[역경의 열매] 이종락 (3) 나쁜 술버릇 때문에 연이은 해고… 생활비까지 떨어져

입력 2021-02-10 03:03
이종락 목사(왼쪽 두 번째)가 1979년 10월 첫 직장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공장에서 근무한 지 3년째 된 어느 날 전 직원이 봄놀이를 갔다. 차에서도 음주 가무가 가능했던 시절, 동료들이 뒤에 앉은 내게 돌아가며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슬슬 취기가 올랐다.

술에 취한 나는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좁은 버스 통로를 뛰어다니며 형광등 유리창 의자 등을 파손하기 시작했다. 동료들도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운전기사는 깨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갑자기 도로변에 차를 멈췄다. 도착지에 가보지도 못한 채 그날 봄놀이는 나 때문에 망쳤다. 이튿날 술이 깬 뒤에야 사태 파악이 됐다. 봄 놀이를 망치고 관광버스 집기를 망가뜨린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 쫓겨났다.

서울 성수동에 있는 원심분리기 제작 공장에 취직했다. 밤낮없이 일하던 직원들은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사장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들과 술 마시고 노래하며 어울리다 보니 노래를 잘한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어느 봄날 회사에서 전체 야유회를 갔다. 사장이 “종락이가 노래 좀 한다며. 나와서 노래해 봐”라고 권유해 노래를 불렀다. 사장은 노래가 마음에 들었는지 간부들 앞에서 나를 칭찬했고 간부들은 내게 술을 따라줬다.

그것이 화를 불렀다. 고주망태가 된 나는 사장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과 분노를 떠올리며 이성을 잃었다. 술상 위로 뛰어 올라간 나는 사장의 얼굴을 발로 찼다. 간부들에게 끌려 내려와 집단 구타를 당한 나는 이튿날 바로 해고됐다. 직장만 잃은 게 아니었다. 고막도 손상됐다.

다시 취직하려고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냈다. 금세 취직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술버릇에 대한 소문이 주변 공장들에 퍼져 있었다.

4개월째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지 못하자 쌀이 떨어졌다. 급기야 아내는 쌀을 구하기 위해 딸의 돌 반지와 결혼반지를 팔려고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를 당해 돌 반지와 결혼반지만 잃고 말았다.

취직이 안 되자 전 직장 동료들이 나를 위로한다며 매일 술을 사줬다. 지금 생각하면 제정신이었나 싶다. 술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데 또다시 술이라니…. 그땐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하루는 늦은 밤 포장마차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세상 한탄을 하고 있었다. 포장마차의 천막 비닐 사이로 힘없이 슬픈 걸음으로 터벅터벅 걷고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속으로 “저 사람도 나처럼 상처가 있고 슬픈 일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걸음이 포장마차에 가까워지자 얼굴이 보였다. 아내였다.

나도 모르게 포장마차 테이블 안으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저 사람에게 상처 준 사람이 나였단 말이야. 나였어.” 살면서 몇 초 만에 술에서 깬 것은 처음이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