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정미소 사고로 한동안 병원에 입원하셨다. 정미소에서 아버지의 빈자리는 내가 채워야 했다. 정미소 일에 익숙해진 나는 기계가 고장 날 때마다 직접 고치며 기계의 원리를 알게 됐다.
기계를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나자 마을 사람들이 TV 라디오 오토바이 등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내 손을 거치면 대부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난생처음 가족과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었다. 틈틈이 검정고시를 준비해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취득했다. 삶에 잠시 봄이 온 듯했다.
당시 내 꿈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남인수처럼 되는 것이었다. 정미소 일이 슬슬 지루해질 무렵 다행히 아버지가 회복되셨다. 여유가 생긴 나는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콩쿠르가 있는 날이면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운이 좋았던지 1등 상품으로 알루미늄 냄비 같은 것들을 종종 받았다. 노래를 부르며 자연스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노래를 제법 부른다는 소문이 나자 동네 나이트클럽에서 남인수 모창 가수로 활동하게 됐다. 인기가 많아지자 여성들과 스캔들이 생겼고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가수가 되겠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상경했다. 서울에서도 큰 가수가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서울이 어떤 곳인가. 나보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무대에 서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던 나는 그간 익힌 기계 기술로 서울 성수동의 유명한 가방 공장에 취직했다. 첫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한 나는 자신감이 생겼고 안정된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워낙 술을 좋아했던 나는 하루도 술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친척 누나가 지금의 아내를 내게 소개해줬다. 가정이 생기면 정신을 차릴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멋지게 꾸미고 나가도 시원치 않을 판에 나는 ‘어떤 여자가 나를 좋아할까’ 생각하며 술을 마시고 주선 자리에 나갔다.
벌겋게 취기가 올라온 나를 본 친척 누나와 아내는 어이없어했다. 친척 누나는 문 앞에 서 있는 내 팔을 꼬집으며 “제정신이냐”라고 했다. 하지만 웬일일까. 당시 아내는 꾸밈없는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고 했다. 나 역시 아내를 본 순간 결혼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1년간 연애하고 1980년 결혼했다. 주례자는 장로님이셨는데 주례사 말미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정에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 마음에 깊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당시엔 그저 좋은 말로만 받아들이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결혼하면 정신을 차리고 가정에 충실할 것이라는 친척 누나의 말은 빗나갔다. 그때까지 내 삶은 주(酒)가 이끌던 삶이었다. 결혼 후 이듬해 첫째 딸 지영이가 태어났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