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외치면서… 태아 생명엔 최소한의 보호도 없다니

입력 2021-02-09 03:06
이상원 총신대 교수(왼쪽 네 번째)가 지난 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행동하는 프로라이프 남성연대 세미나에서 남성들이 낙태죄 개정운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민법 제1000조는 상속의 순위를 정하면서 제3항에 “태아는 상속순위에 관해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태아는 출생 전이라도 상속의 권리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 규정은 민법 제1004조와 연결돼 있어 낙태가 비범죄화되면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민법 제1004조는 ‘상속인의 결격사유’라는 제목으로 ‘고의로 직계존속, 피상속인, 그 배우자 또는 상속의 선순위나 동순위에 있는 자를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한 자는 상속인이 되지 못한다’고 정하고 있다.

여기서 ‘살해’는 ‘낙태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됐고 실제 판결도 있다. 대표적 판결이 대법원에서 1992년 5월 22일 내려진 ‘92다2127 판결’이다. “태아가 호주상속의 선순위 또는 재산상속의 선순위나 동순위에 있는 경우에 그를 낙태하면 구 민법 제992조 제1호 및 제1004조 제1호 소정의 상속 결격 사유에 해당한다.”

만일 앞으로 낙태가 전면 비범죄화된다면, 살해에 낙태행위를 포함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속문제가 불거졌을 때 낙태가 어떻게 악용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악용이야 어떤 법·제도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악용 사례를 벌하거나 바로잡을 기회가 충분히 있는데도 손을 놓고 있다면 정부와 국회의 직무유기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자는 것은 살아서 출생한 아이들과 동일한 법적 효과, 즉 법적 권리를 태아에게 부여해주자는 의미가 아니다. 좌파 성향 인사들의 말을 빌리자면, 인권감수성 차원에서 생명에 대해 최소한의 보호를 해주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낙태죄 논의와 관련해 인권을 소중히 여긴다는 정부와 국가인권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등이 태아의 생명에 대해 최소한의 보호조차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2002년 실제 있었던 일이다. 한 부부가 임신을 확인하고 정기검진을 받던 중 양수검사를 통해 기형아 여부를 확인했다. 당시 부부는 양수검사가 일으킬 합병증이나 유산의 위험성을 듣지 못했다.

양수검사 이후 산모는 감기몸살 및 복통을 느꼈다. 원인을 알지 못하다가 뒤늦게 조기 양막파수로 인해 태아가 태내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부는 사산된 태아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 민법은 태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에 냈다. 헌법소원의 결과는 어땠을까. 사산된 태아의 기본권은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헌재가 태아의 기본권을 부정하면서 내놓은 결정 이유에 태아에 대한 국가의 기본권 보호의무를 명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입법자가 기본권 보호의무를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적 기준이 헌재가 위헌 여부를 판단하는 심사기준이 될 수는 없다. 헌재는 권력분립의 관점에서 소위 ‘과소보호금지원칙’을, 즉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적어도 적절하고 효율적인 최소한의 보호조치를 취했는가를 기준으로 심사하게 된다. 따라서 입법부작위나 불완전한 입법에 의한 기본권의 침해는 입법자의 보호의무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 있는 경우에만 인정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국가가 국민의 법익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런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취한 조치가 법익을 보호하기에 명백하게 부적합하거나 불충분한 경우에 한해 헌재는 국가의 보호의무 위반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입법자는 형법과 모자보건법 등 관련 규정들을 통해 태아의 생명에 대한 직접적 침해위험을 규범적으로 충분히 방지하고 있다. 이 사건 법률조항들이 태아가 사산한 경우에 한해서 태아 자신에게 불법적인 생명침해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해 단지 그 이유만으로 입법자가 태아의 생명보호를 위해 국가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보호조치마저 취하지 않은 것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 더욱이 태아가 살아서 출생한 경우 태아 상태에서 가해진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는 민법 제762조에 의해 유효하게 행사할 수 있으므로 살아서 출생한 태아에 관한 한 태아의 신체, 건강침해는 완전하게 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즉 헌재는 형법과 모자보건법을 통해 태아의 생명이 보호되고 있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민법상 손해배상청구권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태아의 생명보호에 대한 과소보호금지의 원칙 침해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형법과 모자보건법을 통한 태아의 생명보호 장치가 없어질 위기에 있다. 지금은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법익을 보호하는 법률이 전혀 없는 상태다. 국가 스스로 헌법이 명시한 국민의 생명권, 기본권 보호의무를 위반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연취현 변호사 (행동하는프로라이프 사무총장)

[낙태죄 개정이 국민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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