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기 어린 때를 구태여 기억하고 싶은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날마다 돌이켜 자신을 “죄수 중의 괴수”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딤전 1:15)이 내 고백이 되지 않을까.
나는 1954년 8월 경남 거창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유서 깊은 유교 집안이었다. 당시 마을에서 논과 밭이 제일 많았고 정미소도 운영하며 머슴 셋을 둘 정도로 제법 부유했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마을 대소사를 직접 챙기셨던 아버지는 동네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셨다.
넷째인 나는 고등학생 때 집안 어르신과 동네 사람들에게 “아버지 얼굴에 먹칠도 아닌 똥칠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곤 했다. 농번기만 되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손발을 걷어붙이고 진땀을 흘리며 모를 심었는데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기타와 장구를 매고 음주가무에 빠졌다. 18세 때는 집안 어르신들이 못된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고주망태가 된 나를 매질했지만, 그것도 며칠뿐 못된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가엾이 여겨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려고 애쓰셨다. 친인척의 도움을 받아 고등학교 서무과, 콩나물공장 등에 취직시켰지만 나는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 나왔다. 더이상 지인들에게 폐를 끼칠 수도 없고 보낼 곳도 없게 되자 집에서 운영하는 정미소 일을 시켰다.
하루는 아버지가 정미소 일을 봐주겠다며 발동기를 작동 중이었는데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아버지의 점퍼 끝자락이 발동기의 벨트에 끼어 몸이 3m가량 끌려 올라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아 옷자락을 붙잡고 꺼내려 했지만, 발동기 벨트의 힘에 밀려 나 역시 끌려 올라갈 찰나였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갑자기 이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벨트가 벗겨져 작동이 멈췄다. 아버지는 크게 다치셨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지실 수 있었다.
위험천만한 순간에 내가 불렀던 하나님이 현재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그때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성탄절 부활절 등 교회 절기에 맛있는 것을 얻어먹으러 간 게 전부였다.
20대 후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 하나님을 알아갈 때 정미소 사건을 떠올렸다.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니라 위기의 순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내 입술을 주장하셨음을 깨달았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그때부터 하나님은 나를 부르시기 위해 역경의 열매를 예비하신 것 같다. 내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라 입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약력=1954년 경남 거창 출생, 고려신학교 졸업, 고려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 생명사랑운동연합 공동대표, ‘베이비박스’ 운영자, 다큐멘터리 영화 ‘드롭박스’ 출연.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