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필순처럼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벌이는 중견 뮤지션도 드물다. 그동안 꾸준히 음반을 발표해 왔지만 2015년부터 신작을 출하하는 빈도가 한층 높아졌다. 제주 소길리에서의 삶에 모티프를 둔 ‘소길화(花)’와 자신의 노래를 리메이크하는 ‘수니 리워크’ 시리즈를 2017년까지 진행한 뒤 2018년과 2020년 각 시리즈에 해당하는 싱글들을 엮은 정규 음반을 발표했다. 2020년에는 또 한 번 제주의 풍경을 소재로 한 싱글 ‘소랑’과 ‘여덟 번째 별’을 선보였다. 그리고 숨 고를 새도 없이 지난 1월 ‘장필순 리마인즈 조동진’을 들고 음악 팬들을 찾았다.
제목이 일러 주듯 신작은 2017년 세상을 떠난 조동진의 노래들로 채워져 있다. 장필순이 조동진의 노래를 레퍼토리로 삼은 것은 조금도 생경한 일이 아니다. 장필순은 언더그라운드 포크 음악의 대부로 통하는 조동진이 이끈 음악 공동체 ‘하나뮤직’의 일원이었다. 또한 조동진은 장필순의 남편인 조동익의 형이기도 하다. 따라서 ‘장필순 리마인즈 조동진’은 선배를 향한 존경심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담은 헌사, 추모 음반이라 할 수 있다.
음악 스타일은 근래 출시한 싱글들의 합본인 ‘수니 에이트: 소길화’, ‘수니 리워크 1’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두 작품은 악기의 음색, 차분함을 강조하고, 어떤 풍광을 마주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하는 앰비언트 뮤직을 지향했다. 이번 앨범 역시 그 장르의 성격은 어느 정도 유지하지만 사운드의 체구는 훨씬 왜소해졌다. 대부분 곡에서 다소곳한 소리의 키보드가 앞에 나서며, 몇몇 악기가 추가될 때에도 아주 조심스럽게 스며든다. 전자음악의 성격을 간직하는 한편 이번에는 잠잠함에 더 무게를 뒀다.
새로 탄생한 노래들은 조동진의 원곡과 비교해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동시에 공통점도 지닌다. 원곡들은 통기타가 악기의 주연이었으나 편곡, 연주, 프로듀싱을 맡은 조동익은 건반을 주인공으로 선정했다. 리드 악기는 바뀌었지만 정적인 분위기는 고스란히 이어진다. 러닝타임만 약간 다를 뿐 템포는 거의 변화가 없다. 조동진 음악이 나타냈던 ‘느림의 미학’을 되새긴 재해석이다.
장필순은 조동진이 그랬듯 일말의 과잉이나 기교 없이 침착하게 가창을 소화한다. 덕분에 노래들이 무척 편안하게 다가온다. 듣는 이들은 마치 친한 지인이 옆에서 노래를 불러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슬픔이 너의 가슴에’, ‘흰 눈이 하얗게’, ‘나뭇잎 사이로’가 특히 그렇다. 담백함과 살가움이 조동진의 노래에 깃든 인간미, 일상 속 낭만을 충실히 재현했다.
박력과 화려함이 음악 팬들을 휘어잡는 요즘이다. 그런 경향을 따르지 않음에도 ‘장필순 리마인즈 조동진’은 선명한 매력을 발산한다. 온순함으로 온기를 생성하며, 호젓함으로 서정을 견고하게 쌓아 올린다. 조동진의 근사한 노랫말과 선율, 조동익의 세련된 연출, 장필순의 그윽한 가창이 상승효과를 이뤘다. 고성과 예리한 사운드가 환영받는 시대에 조용하지만 꼿꼿하게 든 반기가 힘차게 나부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