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에선 기독교인이 지도자 역할을 했다. 신앙적 양심으로 민족을 위해 일한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 선생이 대표적이다. 기독교가 국가의 희망과 미래를 위해 존재했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교회가 사회공동체로서 기본마저도 유지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사회에서 지도력을 잃은 지도 오래다. 기독교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100년 후 한국 기독교는 희망이 없겠다는 염려가 든다.
구약성경 시편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산 다윗의 고백은 자신부터 시작해 가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간구로 이어진다. 그러나 민족의 울타리를 넘진 못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란 표현이 나온다. ‘우리’라는 표현으로 민족·국가 단위의 신앙을 인류 전체로 확장했다. 교회의 사회적 영역이 세계가 된 셈이다.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해 인류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게 기독교 정신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가 민족 종교에 머물렀다면 인류 역사와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족 종교는 계명과 율법에 매여 과거를 지키는 데 힘쓰기 마련이다. 미래 창조의 역사적 종교, 이것이 예수의 뜻이고 우리에게 부탁한 바다. 이 책임을 맡은 기독교 공동체의 대표적 존재가 교회인 것이다.
성경 속 예수는 교회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했다. 기독교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하나님 나라처럼 바꾸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100여년 전 이 땅에 온 서양 선교사도 교회만 짓지 않고 대학 등 교육기관과 병원을 곳곳에 세웠다. 인간애를 베풀고 사회에 봉사하는 게 기독교 정신이라고 여긴 것이다.
반대로 기독교가 교회주의에 빠지면 모든 사회가 교회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역사와 사회 속에서 판단 받을 수밖에 없다. 교회가 기독교 정신을 살려 우리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면 100년 뒤에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를 위해 일하는 이들로만 교회를 채운다면 유감스런 이야기이지만 100년 뒤 문을 닫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권위는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교회에 권위가 생긴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며 우리를 사랑했는데, 교회가 이웃 사랑을 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부활한 예수는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3번 물은 뒤 “네 양을 치라”고 말한다. 사랑의 사명을 부여한 것이다. 기독교는 사명의 종교다. 사랑의 사명의식이 없다면 교회도 기독교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은 지 1년이 넘었다. 전염병으로 사회 곳곳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에 모범을 보이며 희망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늘어나길 바란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