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운명에 맞선 드라마틱한 삶… 시대마다 다양한 변주

입력 2021-01-30 04:06
장희빈만큼 드라마에 자주 등장했던 인물도 없다. 역관의 딸이지만 어미가 종이어서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녀는 자신 앞에 드리워진 신분제의 벽을 깨고 중전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녀는 사랑과 권력에 눈이 먼 요부이기도 했고, 당쟁으로 얼룩졌던 권력 싸움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가장 사랑했던 남자에게 사약을 받아야 했고 자신의 아들인 경종에게 후사가 없는 것이 그녀의 탓이라는 확인 안 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했고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는 조선왕조실록에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라고 기록될 만큼 외모가 출중했다. 그러나 질투와 모함, 음모와 계략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은 궁에서 사약을 받았는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는지, 죽기 전에 세자를 만나 당부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는지, 그녀에게 사약을 내린 숙종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수많은 행간의 역사를 남기기도 했다.

대중 매체 속 장희빈은 어떻게 변해왔나

그녀가 대중매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1년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KBS)이었다. 궁중 암투를 야담조(野談調)가 아닌 역사극 형태로 그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성우 고은정의 장희빈 연기가 워낙 출중해 청취자들은 라디오 앞에서 꼼짝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라디오 드라마의 흥행에 힘입어 출간된 도서 ‘장희빈’의 일간지 광고 문구에는 ‘백만 청취자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는 문구가 크게 부각돼 있다.

조선 숙종의 빈이자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본명 장옥정)을 연기한 배우 김지미(1961년 영화 ‘장희빈’).

영화계도 같은 해 당대 최고 스타 김지미를 캐스팅해 ‘장희빈’을, 1968년에는 남정임을 주인공으로 한 ‘요화(妖花) 장희빈’을 제작했다. 숙종을 향한 장희빈의 사랑이 도를 넘어 패악의 길을 걸어갔던 이야기를 신파조 멜로스타일로 구현한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배우 윤여정(1971년 드라마 ‘장희빈’). 제작사 제공

이어 TV에 장희빈이 등장했으니 1971년 윤여정 주연의 ‘장희빈’(MBC)이었다. 1969년 MBC TV가 개국한 이후 방송 3사가 본격적으로 일일 연속극 경쟁을 시작하여 매일 3편씩 하루 9편의 일일연속극이 방송되던 7월에 ‘장희빈’이 시작되었다. 거금 30만원을 걸고 여자 주인공을 시청자들의 엽서 투표로 선발할 만큼 시작 전부터 화제몰이를 한 결과 2만5000여 명이 참여했다. 당시 주인공을 놓고 윤여정, 윤정희, 김지미 등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장희빈은 요염한 미색과 오기로 왕을 쥐락펴락하며 한 시대를 농락한 여인으로 그려졌다. 그녀가 왜 그런 삶을 선택을 했는지보다 권력을 가진 한 남자를 향한 사랑의 화신으로 그려냄으로써 왕을 중심으로 한 치정극의 범주에 머물렀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배우 이미숙(1981년 드라마 ‘여인열전-장희빈’). 제작사 제공

윤여정의 뒤를 이은 장희빈은 이미숙이었다. 1981년 ‘여인열전-장희빈’(MBC)은 이전과 달리 본격 궁중 비사(秘史)로 이야기의 외연이 확대되면서 장희빈도 당쟁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기세는 1988년 전인화의 ‘조선왕조 오백년 - 인현왕후’, 1995년 정선경의 ‘장희빈’(SBS), 2002년 김혜수의 ‘장희빈’(KBS)으로 이어지면서 당쟁의 희생양이 아니라 당쟁을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던 인물로 조금씩 변화해갔다.

배우 김혜수(2002년 드라마 ‘장희빈’). 제작사 제공

입궁의 목적이 뚜렷했던 그녀였기에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채 사약으로 한 평생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은 더 극적이었다. 사약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다 떼어낸 방문으로 눌림을 당하기도 하고, 궁인들에 의해 온몸이 잡힌 채 강제로 입을 벌려 사약을 마셔야 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한 만큼 그녀의 최후는 식어가는 땀과 뜨거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혼신을 다한 여배우들의 열연은 매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배우 이소연(2010년 드라마 ‘동이’). 제작사 제공

그러나 2010년 ‘동이’(MBC)에 등장한 이소연의 장희빈은 달랐다. 훨씬 세련된 이미지의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았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인내심을 갖고 있었다. 궁중여인들간의 암투나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여인이라기보다는 한 남자를 향한 사랑과 그것을 넘어선 어리석은 욕심을 후회하는 여인이었다. 사약을 받는 순간에도 그녀는 지아비인 왕을 향해 마지막 절을 올리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애절한 절규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몸부림도 없었다. 신분 상승과 권력욕에 휩싸였던 장희빈보다 장옥정이라는 여인의 삶으로 시청자의 시선은 옮겨가고 있었다.

배우 김태희(2013년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제작사 제공

2013년 김태희의 장희빈은 인간 장옥정에 한 발 더 깊이 다가섰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SBS)는 아예 장희빈의 본명인 옥정을 내세웠다. 정통 사극과 달리 퓨전 사극의 양상을 띠며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인물로 그려진 장옥정은 화려하게 등장했다. 욕망을 간직한 여인이 가진 꺾이지 않으려는 비장한 결기보다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자의 열정이 더 아름답게 피어났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죽음에 이르게 하려고 굿당을 꾸렸다고 알려졌던 이전과 달리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는 의외의 진심이 엿보이기까지 했다. 사약을 받을 때도 그녀는 차분했다. 두려웠겠지만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그녀에게 뒤늦게 달려와 후회의 눈물을 쏟아내던 숙종도 달라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이외에도 2016년 영조와 잊힌 또 다른 왕자의 이야기를 다룬 ‘대박’(SBS)에도 장희빈이 등장한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영조의 생모 최숙빈에 대한 시기 질투로 숙종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수모까지 당했던 오연아의 장희빈은 유배지로 떠나 사약을 받는 것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세자에게 세상을 두려워하는 대신 세자를 위협하고 비난하는 자를 용서하지 말고 꼭 조선의 왕이 되라는 말을 남긴다.

장희빈이 어떤 여인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데는 그녀의 상대인 숙종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근형, 유인촌, 강석우가 연기한 초기의 숙종은 여인의 사랑에 집착했던 왕으로 그려지며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다웠다. 임호, 전광렬부터는 당쟁 속에서 자신과 장희빈의 관계를 고민하는 인물로 그려졌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행동하기보다 해답 없는 고민만 이어가는 답답한 왕이었다. 그러나 지진희, 유아인, 최민수는 치열한 권력 암투 속에서 추락한 왕권을 지켜내기 위해 지략가이자 승부사로서 고민과 함께 왕이면서 남자로서의 고뇌를 함께 그려냈다.

왜 장희빈을 끊임없이 소환했을까

역사 드라마는 과거의 옷을 입고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장르이다. 역사에 기록된 부분을 기본 골격으로 하되 그렇지 않은 부분을 제작진의 상상력으로 채워감으로써 이야기는 풍성해진다. 물론 역사 왜곡과 고증에 대한 논란이 등장하지만 드라마를 다큐멘터리가 아닌 허구의 상상물이라 생각한다면 달라진 내용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각자 해석하는 재미를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굴곡 많은 삶을 살다 비극적 죽음을 맞은 장희빈의 삶은 드라마틱하다. 그리고 당시의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왕권의 실추와 서인과 남인간의 당파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왕에게는 왕권 강화라는 큰 숙제가 있었던 만큼 각각의 관계들을 다른 시선으로 뒤틀어볼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때이다. 1960~70년대의 장희빈은 요부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는 당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던 대중들에게 멜로드라마의 형태를 띤 역사극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또 1980~90년대의 장희빈은 정치물로써의 역사 드라마 성격을 드러내며 궁중 암투에 현실 정치를 투영하여 격변하는 정치 상황에 대한 고민을 담아낼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인간 장옥정에 좀 더 다가서는 모습을 보여준 2000년대 이후의 장희빈은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 진출로 자신의 능력을 발산할 수 있었던 사회 변화와 그 맥을 같이 했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장희빈에 대한 느낌도, 마지막 순간의 모습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드라마가 장희빈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서오릉 외진 곳에 초라하게 묻혀있는 그녀이지만 우리는 어쩜 아직도 그녀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시대가 변할 때마다 그 시대를 대변했던 여인 장희빈, 내일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기대가 된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