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이어 김종철 정의당 대표까지 성추행 파문을 일으키자 진보 진영이 큰 충격에 빠졌다. 이번 정의당 사건은 공당의 대표가 소속 여성 의원을 성추행한 것이란 점에서 파장이 적지 않다. 제도권 정당 중 성평등 이슈에 가장 목소리를 높여 왔던 정의당은 김종철 대표 체제로 전열을 재정비한 지 3개월 만에 최대 위기에 놓였다.
정의당 젠더인권본부장 배복주 부대표는 25일 오전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1월 15일 김 대표의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고, 피해자는 당 소속 장혜영 의원”이라고 밝혔다. 김 대표는 장 의원과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당무 논의를 위해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이후 귀가를 위해 차량을 기다리던 중 김 대표가 장 의원에게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했다는 것이 정의당의 설명이다.
김 대표는 입장문을 통해 “저의 가해 행위는 공당의 대표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며 “어떠한 책임을 진다 해도 제 가해 행위는 씻기 힘들다. 저열했던 성 인식을 바꿔나가겠다”고 사과했다. 장 의원은 입장문에서 “함께 젠더폭력을 외쳤던 정치적 동지이자 마음 깊이 신뢰하던 당대표로부터 인간으로서 존엄을 훼손당하는 고통은 실로 컸다”고 호소했다. 또 “‘피해자다움’과 ‘가해자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성폭력 사건에서 흔히 보이는 편견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1970년생인 김 대표는 ‘노회찬-심상정’을 이을 차기 주자로 여겨져왔던 터라 정의당은 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김 전 대표는 휴대전화를 꺼 외부 연락을 차단하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의당은 26일 대표단회의를 열고 최대한 엄중하게 사안에 대응키로 했다. 배 부대표는 “피해자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고 일상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하면서 가해자에 대해 무관용 원칙으로 가장 높은 수위로 엄중히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 지도부는 내부 의견 수렴과 대표단회의를 거쳐 수습 방향을 정한 뒤 시·도당 연석회의, 전국위원회 등에서 당원들의 의견을 모을 계획이다. 정호진 수석대변인은 “다들 많이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참담한 심정”이라며 “성평등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정의당 당원 게시판에는 “당 대표 사퇴로 끝날 일이 아니다”라며 지도부 전원 사퇴 주장부터 당 해산까지 거론하는 등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또 “당원으로서 정의당을 앞으로 지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회의적인 목소리도 나왔다.
정치권에서 성추문이 터져나올 때마다 성인지 교육 강화, 성폭력 전담 신고센터 설치 등 서둘러 대책을 내놓지만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민주당도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 이후 제도를 개선하고 관련 교육, 피해자 지원을 해나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상담센터는 선거철에만 한시적으로 외부 인력을 수혈해 운영하는 등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 전 시장과 박 전 시장 사건 후 민주당은 당대표 직속 윤리감찰단을 신설했지만 이 또한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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