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 훈련에서 레위기 20~21장을 훈련할 때 거룩함을 강조한다.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이다.(레 20:26)
반면 세상은 아담의 삶을 말한다. 타락한 아담은 가인을 낳았고 예배에 실패한 가인의 후예들은 라멕을 통해 음란을 퍼뜨렸다. 유발을 통해 유행가를 즐기고 두발가인을 통해 전쟁 무기를 만들어 싸움을 일삼다 노아의 홍수 때 모두 죽고 말았다.
가인과 함의 자손들 족보를 보면 셈의 후손과 다른 점이 있다. 그들의 나이가 기록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1000년을 살든 1만년을 살든 관심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홍수 후 노아의 아들 중 함이 가인의 영향을 받았다. 함의 손자 니므롯은 천하를 통일하고 바벨탑을 쌓았다. 니므롯이 외친 구호는 하나였다. “하나님을 없애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창 11:4)
이들의 계획은 수포가 됐다. 언어는 깨어지고 사람들은 그들의 목적과 달리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다.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으로 흩어져 당시 최대의 제국이었던 애굽과 바벨론 제국을 세웠다. 애굽과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괴롭혔다.
오늘날도 세상은 크리스천을 핍박하고 괴롭힌다. 따라서 우리는 주 안에서 강건해지고 마귀의 궤계에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항상 성령으로 준비해야 한다. 교회를 세우는 목적도, 성도를 훈련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시키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다.
가나안 문화에 맞설 영적 군사를 만들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는 무너지고 만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았던 이스라엘 왕들이 대표적 예다. 결국, 저들에게 무릎을 꿇고 나중에는 바알신 앞에 끌려갔다. 그것이 구약 성경의 교훈이다.
당시 시돈과 두로의 도시였던 베니게를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활발했다. 화폐가 필요해 자신들의 얼굴을 화폐에 찍어 넣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돈을 최고로 여겼다.
이후 자본주의가 극심하게 타락해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됐다. 거기에 반발해 생긴 것이 공산주의다. 공산주의자들은 물질이 본질이므로 물질을 동일하게 분배하면 낙원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모르고 한 소리다. 아무리 동등하게 분배해도 인간에겐 본능적으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의 핵심을 들여다보면 하나님보다 인간을 앞세우는 가나안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나안의 문화는 유럽으로 넘어가 학문이라는 옷을 입었다. 영국의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에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의 개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교육과정에 불신앙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같은 시대 독일에서 태어난 카를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공산당 운동을 출발시켰다. 마르크스는 타락한 기독교를 보고 하나님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이론을 만들어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 동유럽의 공산주의는 다수의 자유를 빼앗고 살인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 결과 공산주의는 와해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1968년 유럽의 68혁명이 시작이었다. 이들은 사회의 지속적 발전을 이어온 전통적 가치를 ‘극우’라고 칭하고 자기들은 ‘진보’라 지칭했다. 이들의 사상은 공산주의와 같지만, 공산주의 국가의 실패를 보면서 문화라는 옷을 입고 다시 등장했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네오마르크시즘이라 부른다. 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연결된다. 지금까지의 전통, 기존 개념을 뒤집어 생각하자는 사조다.
이들은 인권을 앞세운 젠더 이데올로기로 정치 문화 교육 방송 노동계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포괄적 인권’이란 이름으로 동성애를 합법화하려 한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는 성경을 따르는 기독교인의 양심까지 통제받는 시대가 올 것이다.
성경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를 억압하고 빼앗아갈 것이다. 궁극적으로 예수 믿는 것이 쉽지 않게 될 것이다. 바벨탑 사건처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인간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은 ‘주안에 거하는 것’이다.(요 15:4~8) 주님도 이 땅에서 사실 때 그렇게 사셨다. 예수님만 그렇게 사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룻도 그렇게 살았다. 다니엘도 사자 굴 속에 있었지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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