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남자를 모른다. 남자를 알아야 시집을 간다’며 성관계 과정을 얘기해줬다는 진술이 있었다. 피해자가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으로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1부(부장판사 조성필) 심리로 열린 서울시장 비서실 전 직원 A씨의 준강간치상 혐의 공판에서 재판부가 읽은 선고문 내용의 일부다. A씨는 지난해 4·15총선 전날 회식 후 만취한 비서실 동료 B씨를 성폭행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입힌 혐의로 이날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B씨는 지난해 7월 박 전 시장을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던 인물이다.
이날 재판부는 공판 과정에서 제출된 B씨 측 증거를 토대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사실로 인정했다. 경찰은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으로 인해 ‘공소권 없음’ 처분으로 수사를 종결했지만 법원이 별건에서 예상 못 한 방식으로 의혹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을 내놓은 셈이다.
재판부의 박 전 시장 관련 언급은 “B씨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박 전 시장의 성추행 때문”이라는 A씨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재판부는 B씨가 정신과 상담치료를 시작한 지난해 5월 초 A씨 범행에 따른 정신적 충격과 고통을 호소했고,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진술은 5월 중순부터 나왔다고 논박했다. 시간의 선후 관계를 볼 때 A씨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이 과정에서 비서실 근무 1년째부터 박 전 시장에게서 ‘냄새를 맡고 싶다’거나 ‘사진을 보내 달라’는 문자를 받았다는 B씨의 상담 내용을 밝혔다. 재판부는 B씨가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로 힘들어했지만, 그에 앞서 A씨의 범행 때문에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은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A씨는 재판 과정에서 B씨의 신체 일부를 만진 사실은 있지만 강간을 한 적은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해자는 수사 단계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강간 피해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한다”며 이를 기각했다. 유전자검증에서 체액 등 증거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A씨 주장도 “피해자가 사건 직후 30분 동안 샤워를 했고, 유전자 감정 의뢰가 사건 며칠 이후 이뤄졌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B씨를 대리한 김재련 변호사는 선고 직후 “피해자가 박 전 시장을 고소했지만, 사망으로 법적 호소의 기회를 잃었는데 재판부가 일정 부분 판단해주신 게 피해자에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