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에 유해한 성분의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해 소비자가 목숨을 잃거나 상해를 입게 한 혐의로 기소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 등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들 기업이 사용한 클로로메틸아소티아졸리논(CMIT) 및 메틸아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은 폐질환이나 천식 등 호흡기 질환을 일으킨다는 점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부장판사 유영근)는 12일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 관계자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현재까지 이뤄진 모든 연구 결과를 종합해도 CMIT 및 MIT 성분이 폐질환이나 천식을 유발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옥시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호흡기 독성물질로 증명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및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을 사용한 것이어서 이번 사건과는 구분된다고 설명했다. 앞서 신현우 전 옥시레킷벤키저 대표는 2018년 1월 대법원에서 업무상과실치사 등 혐의로 징역 6년이 확정됐다.
홍 전 대표와 안 전 대표 등은 당시에도 CMIT·MIT 함유 제품의 유해성이 입증되지 않아 기소를 피했다. 이후 유해성에 대한 학계의 자료가 쌓이고 환경부가 관련 연구 결과를 제출함에 따라 2018년 검찰 재수사가 시작됐고, 지난해 기소됐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CMIT 및 MIT를 주원료로 한 가습기살균제 ‘애경 가습기메이트’ 등과 폐질환이나 천식 발생의 인과관계 여부였다. 재판부의 결론은 “여러 기관의 독성 실험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환경부 종합보고서에 대해서도 “인과관계를 증명하지 못한 기존 연구 결과들에 대한 전문가들의 추정이나 의견을 제시한 일종의 ‘의견서’”라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특히 재판부는 “국립환경과학원은 2017년 8월~2018년 8월 CMIT 및 MIT의 권장사용량을 833배까지 설정해 4주간 하루 20시간, 주 7회 빈도로 노출시키는 실험을 진행했는데도 폐 염증이나 섬유화는 관찰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연구의 책임자는 “CMIT 및 MIT는 PHMG와 달리 폐섬유화와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게 맞다”고 증언했다.
전문가 중에는 검사 신문에서 CMIT 및 MIT 성분 가습기살균제와 공소사실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진술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변호인이나 재판장 신문에서 누구도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진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향후 추가 연구결과가 나오면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나온 증거를 바탕으로 형사사법의 근본원칙 범위 내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측은 선고 직후 “판결에 수긍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검찰은 “1심은 전문가들이 엄격한 절차를 거쳐 심사한 가습기살균제 피해 판정 결과를 부정했다”면서 항소 방침을 밝혔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