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 급하게 발의했다가… “아차, 취소”

입력 2021-01-12 04:01

‘일하는 국회’를 표방한 21대 국회에서 부실 입법이 쏟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의원 입법으로 발의했지만 검토 결과 문제점 또는 부작용이 있어 스스로 취소한 ‘철회 법안’이다. 법안 발의 건수만 놓고 보면 사상 최대인 21대 국회 입법 과잉의 어두운 그림자라 할 수 있다.

국민일보가 21대 국회 들어 발의됐다가 철회된 법안을 분석한 결과 이들 법안 다수는 법안 관련 이해당사자와의 조율이 불충분한 상태로 발의됐다. 개정 내용은 같은데 법만 바꿔 건수를 늘리는 ‘복붙‘(복사해 붙여넣기) 법안도 있었다.

특히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극심한 갈등, 부동산 대책을 둘러싼 여야의 입법 경쟁이 과열되면서 의원들 스스로 무리한 법안을 쏟아내며 입법부의 권위를 무너뜨린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민일보가 11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21대 국회 개원 7개월 동안 철회된 법안이 58건에 달했다. 19대와 20대 국회의 4년간 철회 법안이 각각 172건, 215건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큰 수치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21대 국회 4년간 철회 법안 수는 19대와 20대 국회를 훌쩍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철회 법안 중 다수는 사전에 이해관계 당사자들과의 충분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발생했다.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초 정신질환자도 이미용사, 조리사, 요양보호사, 사회복지사 등 9개 업종에서 자격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 9개를 무더기로 발의했다가 2주 후 모두 철회했다.

정신질환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모든 업종에서 정신질환자의 취업 제한을 풀어달라고 주장하며 임 의원 측과의 이견 조율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의원실 관계자는 “좋은 취지에서 발의했지만 점진적으로 가려는 우리 입장과 전면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단체 측 입장이 달랐다”고 설명했다.

따가운 여론에 밀려 법안을 철회한 사례도 있다.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은 대한민국의 헌정 발전에 공헌한 전현직 국회의원 중 일정 요건을 갖춘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도록 하는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 개정안을 냈다가 ‘도 넘은 특혜’라는 비판에 법안을 철회했다.

민형배 민주당 의원은 5·18민주화운동의 정의 조항만 추가한 법안 4건을 지난달 초 한꺼번에 발의했다가 1주일 후 철회했다. 이후 같은 내용의 법안 4건을 다시 발의했다. 자구 수정이 되기 전 법안을 국회 의안과에 제출했고, 최종 검토 과정에서 이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탓이다. 민 의원실 관계자는 “실무자의 실수로 수정되기 전 법안을 올렸다”며 “전자발의 시스템에선 수정이 되지 않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이 자신이 발의한 법안을 철회한다는 것은 그만큼 법안을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았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또 반대 여론이 높아지며 주변 상황이 불리해지자 설득에 나서는 대신 입법 의지를 쉽게 꺾는 예도 있다. 국회 관계자는 “법안 철회는 통상 충분히 검토하지 못한 채 발의했다가 뒤늦게 오류가 발견되거나, 혹은 발의 이후 이해당사자들이 강하게 반발할 때 생긴다”며 “무엇보다 의원의 법안 발의 건수를 중시하는 풍토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21대 국회의 의원입법 건수는 과거보다 크게 늘었다. 16대 국회에서 발의된 의원입법 건수는 1651건이었으나 17대 국회 5728건, 18대 국회 1만1191건, 19대 국회 1만5444건으로 급증했다. 20대 국회에선 2만1594건으로 2만건을 처음 넘어섰다. 7개월 남짓 지난 21대 국회의 의원입법 건수는 6594건에 달한다.

철회 법안 58건을 소속 정당별로 살펴보면 민주당이 44건으로 75.6%를 차지했다. 국민의힘 10건, 정의당 1건, 무소속은 3건이었다. 의원 개인별로는 임 의원 9건, 민 의원 4건, 소병훈 의원 3건으로 집계됐다.

충분한 법률적 검토 없이 일부 지지층의 주장만 반영하거나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해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안을 내놓는 사례도 있다.

신정훈 민주당 의원은 다주택 고위 공직자가 60일 이내 주택을 매각하거나 부동산을 백지신탁하도록 하는 내용의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지난해 7월 발의했다. 매각 대상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이를 어길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을 물리는 내용이 포함됐다.

윤재갑 민주당 의원도 다주택 고위 공직자를 겨냥해 1채 이상이 투기과열지구나 조정대상지역에 있으면 이를 처분토록 하고, 그러지 않으면 승진과 임용 등의 과정에서 인사 조치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들은 현재 해당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하지만 행안위 전문위원실은 검토 보고서에서 “직무 관련성과 가족 구성원의 거주 목적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1주택 외 주택을 처분토록 하는 것은 이해충돌 방지라는 입법 목적보다 기본권 제한의 범위가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또 “신 의원 안은 부동산 매각 후 감정평가액을 초과한 부분은 국고로 환수하도록 규정해 객관적 교환가치 측면에서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우려했다.

지난해 ‘추-윤 갈등’ 국면에서 ‘윤석열출마방지법’ ‘추미애방지법’도 등장했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는 현직 검사와 법관이 공직선거 후보자로 출마하려면 1년 전 사직토록 하는 검찰청법·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야권의 차기 대선 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윤 총장이 오는 7월 임기가 끝나는 점을 감안, 2022년 3월 대선에 출마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야당도 지난해 말 윤 총장 징계를 주도한 추 장관을 겨냥해 ‘추미애방지법’을 발의했다. 전주혜 국민의힘 의원은 법무부 장관이 특정 정당의 당적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전문가들은 의원의 입법권을 존중하지만 정치적으로 활용된다면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특정인을 겨냥한 입법이 실제로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추 장관이나 윤 총장이 여론의 관심에서 사라지면 법안도 상임위에 상정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상진 김판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