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백신 보급 확대와 미국의 블루 웨이브(민주당의 의회 석권)에 따른 경제 정상화 기대로 국제 원자재 시장이 들썩거리고 있다. 중국 주도의 ‘원자재 슈퍼 사이클’이 재현되면서 경기가 회복되기도 전에 인플레이션이 먼저 엄습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이 집계하는 19개 원자재에 투자하는 선물·옵션 펀드의 넷롱(net-long·매수 우위) 포지션이 지난 5일(현지시간) 230만 계약으로 2011년 1월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옥수수, 대두 등 곡물을 비롯해 원유, 금, 구리 등 원자재 가격은 최근 6개월 동안 45% 이상 상승했다. 옥수수는 중국이 미국 시장에서 사상 최대치의 물량을 쓸어담고 있고, 대두는 1991년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농산물 가격 상승은 남미 지역의 라니냐(동태평양의 적도 지역에서 나타나는 저수온 현상) 영향도 받고 있다. 국제유가는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기준으로 OPEC+(석유수출국기구와 10개 주요 산유국의 연대체)의 감산 영향까지 겹치면서 8일 종가 기준 52.24달러로 코로나19 발생 직전인 지난해 2월 24일(51.43달러)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유가 상승률을 넘어선 구리 등 금속 원자재 가격 상승세는 경기 회복 기대치를 반영하고 있다. 지난해 30% 이상 상승했던 구리 가격은 지난 8일 8146달러로 올 들어 5.2% 올랐다. 2010년대 초반 중국 고정투자 사이클 둔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하이투자증권은 달러화 약세에 편승한 글로벌 자금의 위험자산 선호 현상과 함께 블루 웨이브에 따른 바이드노믹스, 특히 인프라 관련 투자 확대 기대감은 원자재 가격의 또 다른 상승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식지 않는 과잉 유동성까지 맞물리면서 저물가 기조를 되돌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대신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8월 17.3%를 기록한 이후 2개월 연속 전월 대비 둔화됐던 글로벌 통화공급지수의 전년 동월 대비 증가율은 11월 19.4%를 기록하면서 전고점을 돌파했다.
특히 전 세계 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인플레 우려가 최대 관심사다. 미국 ISM 제조업지수의 세부 항목인 가격지수는 12월 77.6로 전월보다 12.2포인트나 상승하며 2018년 5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제조업 회복이 물가를 자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대 인플레 심리를 가늠하는 브레이크이븐레이트(BE)는 2년 만에 2%를 돌파하고 미 재무부 채권의 장단기 금리차도 확대되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몇 년 동안 물가상승률이 2%를 넘더라도 기준금리를 인상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1% 포인트 가까이 확대된 시장의 장단기 금리차가 어디까지 벌어지느냐가 연준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척도가 될 전망이다.
다만 코로나19 확진자 증가세로 노동시장이 다시 침체 상태를 보이고 있어 본격적인 소비자물가 상승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13일 발표할 12월 미국 소비자물가는 1.3%대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소비자물가 구성비를 보면 식료품 및 에너지 관련 비중은 20%에 불과한 반면 60%를 차지하는 서비스 업종이 살아나지 않고 있어 물가 압력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또 지난 20여년간 수치로 볼 때 미국 경제가 완전고용이 실현되더라도 인플레를 자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이유로 미국의 올 경제성장률을 6.4%로 높여 잡더라도 근원물가 상승률이 2024년까지 2%에 도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백신 보급으로 인한 왕성한 이동성 회복과 수요 정상화 이후에나 서비스물가 압력이 높아질 공산이 높다”고 말했다.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