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진영 간 분열과 대립, 갈등은 우리 역사상 가장 심해졌어요. 나라가 가장 심하게 분열돼 있다는 거죠. 진영에 갇히는 건 생각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진영에서 이미 만들어진 논리와 이념만 그대로 재생산하면 되거든요. 모두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사느냐, 진영의 삶을 사느냐, 당신 자신은 어디 있는가.”
새해 첫 인터뷰를 위해 철학자 최진석(62) 서강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새해를 맞아 우리 사회의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코로나19 이후 가야 할 방향에 관한 통찰을 듣고자 했다. 그는 노장철학의 권위자로 청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명쾌한 강의로 잘 알려진 스타 인문학 강사이기도 하다. 그와의 인터뷰에서는 ‘생각’ ‘생각하는 능력’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모두의 기대처럼 올해 백신 접종으로 코로나19가 퇴치된다면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시대정신은 무엇일까요.
“선도국가로 도약하는 것에 방향을 맞춰야 합니다. 과학기술 문명이 준비돼 있고 사회의 제도적 모순도 극에 이르렀는데 인간은 과거에 익숙한 방식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거든요. 그러면 팬데믹이나 전쟁처럼 이것을 강제로 적용하거나 강제로 모순을 해결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는 일이 일어나요. 지금 우리가 그런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팬데믹을 이기기 위해서 도입되는 기술 문명에 과감하게 적응해서 우리 민족사에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 선도국가가 되는 걸 한번 해보자는 거죠.”
-이전 강연과 인터뷰에서 우리나라가 모든 면에서 한계에 도달했다고 지적하셨는데 현재의 상황은 어떻게 진단하시나요.
“우리나라는 한계에 갇힌 지 오래됐어요. 한계에 갇혔다는 건 익숙한 방식으로 가능한 가장 높은 곳에 이미 도달했다는 뜻도 되죠. 박근혜 대통령을 부정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등장했는데 박 대통령 때 있었던 많은 문제가 똑같은 형태로 반복되고 있어요. 이런 수평적 왕복 운동을 멈추고 수직적 상승을 해야 합니다. 수직적 상승의 한 형태가 중진국을 벗어나서 선도국가로 도약하는 겁니다. 중진국까지는 생각하는 능력이나 창의성이 크게 요구되지 않아요. 따라가기만 하면 되거든요. 선도국가는 자기 스스로 생각을 해야 하죠. 창의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변화예요.”
-이제 중진국의 함정에서 탈출할 수 있는 역량이 갖춰졌다고 보시는 건가요.
“역사에서 1820년대를 대분기(大分岐)라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가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간격을 확 좁힌 나라가 있어요.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대한민국이거든요. 세계에서 유일해요. 다만 간격을 좁힌 것이지 선진국으로 올라서지는 못했죠. 그런데 기회가 왔어요. 과거의 패러다임이 깨지고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이때에 마침 우리 국력이 제일 강해요. 선도국가로 올라서겠다는 의욕을 가진다면 지금이 기회죠.”
-그렇다면 2021년의 어젠다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저는 김대중 대통령 이후로 국가 리더십이 반쪽의 역사 리더십, 진영의 리더십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요. 국가 레벨의 리더십은 궁극적으로 통합의 리더십이거든요. 그런 리더십을 보여주지 않으면 국가 역량을 총집결할 수 없어요. 그래서 반쪽의 리더십을 극복해야 하고, 그다음에 국가 레벨의 어젠다 설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난해에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혁명은 어젠다, 구조가 바뀌는 거예요. 저는 촛불혁명은 실패했다고 말하는데, 이유는 이런 거예요. 정권이 언론을 장악하는 게 적폐였어요. 그러면 언론 장악이 사라져야 해요. 정권의 검찰 장악이 적폐였어요. 그러면 검찰 장악이 사라져야 하거든요. 그래야 혁명이죠. 그런데 그런 일들이 그대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무슨 일만 생기면 법을 만들어 제어하려고 해요. 5·18 역사왜곡처벌법처럼요. 법을 남용하거나 임의로 적용하면서 법치를 흔들고,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통치로 전락하고,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고 민주와 자유가 오히려 후퇴했어요. 우리는 지금 역사 퇴행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진영과 성별, 세대로 나뉘고 서로를 향한 혐오와 갈등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통합으로 가는 해법이 있을까요.
“당장은 방법이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국가는 국방과 조세라는 두 기둥으로 서 있고, 정치와 교육이라는 두 톱니바퀴가 작동해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서 정치 역량이 형성되고, 정치는 교육에 굉장히 강력한 환경을 제공합니다. 분열과 갈등이 심하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정치에서 제공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는 분열을 이용하고 있어요. 정치 환경이 변화되지 않고는 정치인들이 분열을 통해 얻는 기능적인 효과를 버리려 하지 않을 거예요. 멀리 보면 공멸의 길이지만, 언뜻 보면 자기 진영을 더 공고히 하거나 단기적인 승리를 거두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정치공작만 남고 정치는 망가지는 것이죠.”
-진영 싸움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시해주신다면요.
“생각하는 능력을 빨리 회복해야 해요. 생각이라는 것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기반으로 하거든요. 궁금증과 호기심은 항상 밖을 향해 열려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는 사람은 개방적이에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폐쇄적이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 폐쇄화가 극단화돼 있어요. 제가 새말새몸짓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고 전남 함평에서 기본학교를 하고 있거든요. 목표는 하나예요. 생각하는 자를 만드는 것. 내가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사는지 아니면 고유하고 독립적인 나 자신의 삶을 사는지를 구분하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 저는 이게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생각하는 능력이 있어야 나는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를 묻게 됩니다. 이런 질문을 통해 자신이 자신에게 분명해지면 탁월해집니다. 진영에 갇혀서 분기탱천하는 지질한 삶을 살지 않죠.”
-새말새몸짓을 세운 것은 정치와 교육이라는 두 톱니바퀴 중에 교육을 택하신 건가요.
“교육이 사실은 고도의 정치 행위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정치도 인재가 하는 거예요. 미래도 인재가 여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교육이라는 범주로 활동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치를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죠. 지금 정치가 진영에 갇혀 있는 건 교육에서 생각하는 인재를 공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정치의 실패는 교육의 실패, 정치가 혼란스럽다는 건 교육이 혼란스럽다는 말을 반드시 함축하죠.”
-언론에서는 교수님을 실천철학자라고 하고 사회와 소통하는 철학자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철학자가 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느냐’며 반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사실 이게 철학이에요. 소크라테스도, 칸트도, 플라톤도, 노자도, 공자도 다 그랬죠. 이 세계에서 문제를 발견해서 그 문제를 가장 높은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사유하고 활동하는 것, 그것이 철학이에요. 그래서 철학은 과학, 정치, 사회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거죠. 이렇게 구체적으로 등장해 있는 문제들에 대해 사유하지 않고 발언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오히려 철학이 아닌 겁니다.”
-최장집 홍세화 강준만 선생님 등 진보 지식인들이 현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교수님도 정부에 아픈 얘기를 하셨는데 비판적인 지지, 애정 어린 비판인 건가요.
“저는 비판 대상들에게 애정은 없고, 대한민국에만 애정이 있어요. 진보냐 보수냐를 따져서 진보 지식인들이 비판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분들은 그냥 지식인들이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진보니 보수니 프레임에 가두는 일을 해요. 그러면 언어들이 발화되는 순간 정치화돼버려요. 프레임을 공유하는 진영의 문제로 작아진 후 휘발돼버리죠. 내 말들도 어떤 프레임 속에서 잠시 소비되고 사라질 것이라는 걸 알아요. 그런데 내가 나로 살고 싶어 하고 지식인의 자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 시대에 해야 할 말은 흔적으로라도 남겨야 된다는 거예요. 나한테 떳떳하고 싶으니까.”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석 달 앞으로 다가왔고, 보궐선거가 끝나면 2022년 대선 국면에 진입하게 됩니다. 새 시대에는 어떤 리더십이 요구될까요.
“기품과 생각하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기품이라는 것은 절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절제할 수 있다는 것은 염치와 수치심을 안다는 거예요. 염치를 알고 수치심을 가지면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정치권에서는 거짓말이 너무 일상화됐어요. 염치를 알면 권력도 남용하지 않죠. 진영에서 벗어나 국가 레벨의 미래 어젠다를 설정하는 건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만 가능합니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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