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거여의 입법 폭주를 우려한다

입력 2021-01-04 04:06

대통령이 없는 민주국가는 있어도 의회가 없는 민주국가는 없다. 그만큼 민주주의 실현의 핵심적 요소로 인정되는 것이 의회제도이며, 이러한 의회제도의 본질은 ‘집단적 대표’라는 점에 있다. ‘개인적 대표’인 대통령이 개인으로서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것과는 달리 의회는 의원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수백명 의원들이 논의해 내린 결론만이 국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의회가 입법을 담당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수많은 행정업무를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방대한 행정조직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형 구조로 형성돼 상명하복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것과는 달리 의회의 입법은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백명 의원들이 제각기 수렴하고, 이를 의회 내 논의 과정에서 타협 조정해 법률이라는 형태로 정제하는 것이다. 당연히 입법은 행정에 비해 신속성과 능률성이 떨어지지만, 그만큼 민주성과 책임성이 높아진다. 행정에 대한 ‘법률의 우위’가 인정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거대 여당의 입법 독주는 대한민국 국회가 의회로서의 본질적 기능을 벗어나고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현대적 권력분립하에서 정부와 여당이 하나로 묶여서 활동하는 정당국가화 현상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국회는 여전히 정부에 대한 통제기능을 해야 하며, 이를 포기할 경우에는 삼권분립이 붕괴되고, 결국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불합리한 이민 정책 등을 발표했을 때 여당인 공화당이 야당인 민주당과 협력해 이를 막았던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 의회의 통제기능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여당이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던 것은 언제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당의 갈등,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비박으로 나뉜 새누리당의 갈등 이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그조차 정상적인 국회의 통제라 보기 어렵다. 더욱이 21대 국회 출범 이후 국회 내 압도적 다수의석을 차지한 여당이 정부 정책에 따라 각종 입법안들을 야당의 반대나 국민 여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속전속결로 처리하고 있는 것은 신속성과 효율성보다 민주성과 책임성을 우선시하는 의회의 본질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21대 국회에 들어와서 법안 발의가 20대 국회의 같은 기간에 비해 1.7배 늘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5·18비판금지법, 대북전단금지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 등이 국내외 비판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통과됐다는 점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정파적 의도를 담아 검찰청법 폐지법률안, 검사징계법 개정안, 1가구 2주택을 문제삼는 주거기본법 개정안 등이 무수히 발의되고 있다. 이는 여당에서 말하는 ‘정치의 사법화’의 대척점에 있는 ‘입법의 탈법치’라고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법치의 기준점은 헌법이다. 입법을 담당하는 국회, 행정을 담당하는 정부, 사법을 담당하는 법원·헌법재판소가 모두 헌법에 구속된다. 그중에서 헌법을 일차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입법이며, 정부의 행정작용과 법원·헌법재판소의 사법작용은 헌법과 법률을 기준으로 한다. 즉, 입법은 정치 과정과 법치가 만나는 지점이며 이를 통해 국가질서의 기본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와 법치는 상호 보완 및 상호 견제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 정치 과정을 통해 법률이 만들어지지만, 그렇게 헌법을 구체화해 만들어진 법률에 의해 정치 과정이 구속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대 여당이 불편한 법률에의 구속을 피하고자 그런 법률을 임의로 폐지하거나 개정하는 것은 법치의 근간을 붕괴시키는 것이며, 결국 헌법질서의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검찰이 불편하다고 검찰을 폐지하겠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사고인가. 그런 논리라면 국회는 벌써 수십번 폐지됐어야 할 것이다.

민주화 이후 거대 여당의 입법 폭주는 처음 경험하는 것이지만,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입법 폭주는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유정회를 두어 여당이 압도적 다수의석을 차지했던 유신 시절의 입법과 더불어 신군부 집권 이후 국가보위입법회의가 6개월 동안 189건의 법률을 제정했던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제정·개정됐던 법률들의 위헌성 문제는 현재까지도 심각한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민주화된 국회에서 그때의 모습을 재연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