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중앙중학교 교감을 맡았다. 분에 넘치는 직책이었지만 정부의 교육 정책에 대한 회의, 정신적 지도력 한계 등으로 이곳에 계속 있어야 할지 적잖이 고민이 됐다. 그 무렵 서울 남산의 옛 조선신궁 자리에 있는 장로회신학대와 서울역 근처의 한국신학대학에서 강사 청탁이 왔다. 장신대는 박형룡 목사가, 한신대는 김재준 목사가 학장으로 있었다.
나는 한신대를 택했다. 학문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신대에서 강사를 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연세대 신과대학에서도 기독교 윤리학을 강의해 달라는 청탁이 왔다. 당시 재학생이던 민경배 교수 등이 내 강의를 요청한 것 같다.
한신대와 연세대에서 1년 정도 강의를 했을 때였다. 고려대에서 시간강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 제안을 수락해 고려대로 가려던 차에 백낙준 연세대 총장이 급히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백 총장은 “김 선생은 신학 전공이 아니라 철학과 출신이니 문과대학 철학과에서 수고해 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것이 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세대는 주께서 주인 된 포도밭 같은 소중한 일터였다. 1954년 철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했을 때 나는 34세였다. 이때 다짐한 게 있다. 연세대에 있는 동안은 연구하고 강의하는 교수다운 교수로 머물자는 생각이었다. 대학을 마치고서는 일제강점기 도피 생활, 해방 직후 혼란, 한국전쟁이 이어져 학문에 집중할 수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교내 보직과 행정엔 관여치 않고 대외적으로도 교육관련 활동만 하기로 했다. 훗날 ‘교수다운 교수로 시종일관했다’는 평가를 받는 교수가 되자고 다짐했다. 85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31년간 연세대에 봉사했다. 2003년까지 진행한 특수대학원 강의까지 하면 만 60년을 연세대 강단에 선 셈이다. 건강과 일을 허락해 준 주님께 감사드린다.
연세대로 오면서 대외 활동의 반경이 넓어졌다. 그중 하나가 방송 출연이었다. 중앙중학교에 몸담았던 시절, 종로의 CBS기독교방송에 자주 출연한 게 계기가 돼 KBS와 MBC에도 출연했다. 삼성그룹이 시작한 동양방송(TBC)에도 2년간 아침마다 10분씩 출연해 인생과 교양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방송으로 이름이 알려지면 인기를 얻게 돼 그 인기가 인품까지도 높여준 듯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성인과 정신적 지도자는 다수의 인기보다 적은 수라도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교수직을 가진 나로서는 그 한계를 지키는 게 무척 어려웠던 것 같다.
대학 밖에서 강연할 기회도 늘었다. 54년 흥사단 강연을 계기로 군부대, 사회단체, 기업체 등에서도 강연을 했다. 처음 강연할 때는 오래지 않아 후배 교수가 뒤를 이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껏 강연을 계속하고 있다. 강연의 결과도 좋았던 것이라 스스로 위로해본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