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위문품

입력 2021-01-04 04:04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학창 시절에는 해마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위문편지를 쓰곤 했다. 위문품 자루는 주간지나 라면, 껌, 과자 같은 것으로 채웠다. 거기다 편지지 한 묶음과 볼펜 두 자루 정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편지라고 해야 ‘전방에 계신 일선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안부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갖고 가면 전교생의 정성을 모아 전방의 군인들에게 보낸다고 들었다.

세월이 지나 군에서 신병생활을 할 때였다. 위문품이 도착했다고 했지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학창 시절에 그저 학교에서 숙제처럼 제출하라고 해서 부피만 그럴 듯하게 포장한 위문품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큰 자루를 메고 온 선임하사가 내무반에 물품을 쏟아 놓았다. 내용물을 알 수 없으므로 누구 것이 더 좋은지 모른다고 했다. 그냥 나누어 주는 대로 받고 불평 말라고 했다. 내가 받은 위문품 꾸러미는 다른 것보다 묵직했다. 궁금했지만 쉽게 열 수가 없었다. 세숫비누와 치약, 칫솔이 들어 있다고 좋아하는 상급자도 있었다. 어서 열어보라고 재촉해 끈을 풀었다. 읽을거리라고는 전우신문밖에 없는 병영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었는지, 어머니가 읽던 잡지를 넣은 것 같았다. 취침시간이라 선물 꾸러미를 잘 챙겨두고 잠을 청했지만 좀처럼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이따가 보초 근무 때 펼쳐 보리라.

어느새 잠이 들었을까 했는데 보초 근무 차례가 됐다. 다들 깊은 잠에 빠져 든 시간, 몰래 잡지를 꺼냈다. 읽을 기사를 고르는데 책갈피에 끼워 놓은 1만원 지폐 한 장이 보였다. 이 책을 읽던 주부가 몰래 숨겨놓은 비상금은 아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병영생활에 고생한다고 보낸 위로금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책을 덮고 숨을 가다듬었다. 당시에 1만원이면 고액이었다. 며칠 뒤 훈련소에서부터 함께 고생했던 졸병 셋이 모여 즐겁게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그 위문품을 보내준 학생이 고맙기만 하다.

오병훈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