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연리 교회로 찾아오는 피난민은 점점 늘었다. 밤에는 좁은 예배당이 잠자리로 가득 찼다. 힘든 상황에서도 피난민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낮에는 가까운 부산항이나 미군 부대에서 무기와 군수물자 운반을 돕는 일을 했고 저녁엔 예배를 드린 뒤 잠을 청했다. 새벽에는 다 같이 기도회에 참석한 뒤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갔다. 나는 새로 생긴 중앙학교의 부산분교 교감으로 일했다. 주말엔 교회 봉사를 했고 설교도 때때로 했다. 아내는 예배 때 풍금 반주를 하며 교회를 도왔다.
하루는 대연리에서 멀지 않은 광안리의 육군 피복창에서 일하는 이들이 찾아왔다. 피복창에 일하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은데, 이들이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부대 안에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수락했다. 교회 봉사는 주께서 맡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매주 부대에서 설교하니 부대 본부에서도 전도 강연을 겸한 교양 강좌를 요청해왔다. 전쟁 중에 군대를 도울 수 있어 마음이 뿌듯했다.
얼마 뒤 부대 안 교회는 군목이 예배를 책임지게 됐다. 일부 교인은 내가 계속 설교하길 원했다. 그러면 교회에 온 목회자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거절했다.
부대 밖 교우를 위해선 예배 공동체를 만들었다. 새 교회당이 생기면 목회자를 모시는 조건으로 교회 봉사를 수락했다. 내 본업은 교사이기에 언제든 교회를 떠날 수 있었다. 나는 목회자 없는 교회에서 목회자를 대신해 교회를 섬겼다. 이곳이 지금의 광안장로교회다. 휴전되고 서울로 환도하면서 내 교회 봉사는 마무리됐다.
이즈음 나는 자주 광안리 해변에 나가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서울역에 있는 많은 지게꾼이 짐 주인을 기다립니다. 지게꾼은 짐 주인의 뜻에 복종할 뿐입니다. 저는 주의 작은 종일 뿐입니다. 주님이 부탁하는 짐을 지고 뜻하는 곳까지 가겠습니다.” 이때 드린 기도는 지금도 내 평생의 인생관이 됐다.
부산 피난 생활은 한국 장로교의 분열을 목도한 시기였다. 1952년 부산 중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 지지파와 보수 신학 지지파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지인의 초대로 방청권을 얻어 지켜보던 나는 도중에 나와버렸다.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선 지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보이는 행태에 크게 실망했다. 기독교가 조국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허탈감에 빠져 미국문화원 앞을 지나던 중 어디선가 음성이 들렸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는 말씀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미국문화원 지붕 위 하늘을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다짐했다. “고인을 장사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도 얼마든지 있다. 그 책임을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이날 일은 내 신앙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