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 올해 미국서 들었던 ‘말·말·말·말’

입력 2020-12-30 04:03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했던 2020년이 저물어간다. 올해 미국을 관통했던 키워드는 두 개, 코로나19와 트럼프였다. 올해 미국에서 취재 과정 중에 들었던 말 가운데 강렬하게 느껴졌던 4개 발언을 꼽아 우울한 유화 같았던 한 해를 정리해 본다.

-“미안하지만, 한국은 작고, 군사적으로 약한 나라다.” 올 한 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방위비 분담금 문제 등으로 지긋지긋하게 한국을 괴롭혔다. 이 말은 트럼프의 압박이 거셌던 7월 말 미국 싱크탱크의 한반도 전문가로부터 들었다.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을 지지했던 진보 성향 전문가의 발언이어서 충격파가 더 컸다. 이 전문가는 한국에 위협을 가하는 트럼프를 욕하면서도, 그가 밀어붙이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이 말을 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온 국민이 합심해 국력을 키워도 모자랄 판에 진보·보수로 갈라진 국내 사정을 보면 답답함이 커진다.

-“미국에 이렇게 인물이 없을 줄 몰랐다.” 미국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 개막전이었던 아이오와주 코커스의 유세가 진행됐던 2월 2일 얘기다. 미국 대선은 조 바이든과 트럼프의 대결이 아니라 ‘반(反)트럼프 대(對) 트럼프’의 혈투였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트럼프를 무찔러야 한다는 전투욕에 불탔지만 ‘만약 지면 어떡하나’ 하는 초조함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40대 백인 남성이었던 이 지지자도 트럼프를 녹다운시킬 확실한 필승 카드가 없다고 한숨을 쉬며 이 말을 했다. ‘아, 이 사람이다’ 하는 기대감을 심어주는 새로운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당의 최종 선택은 78세 바이든이었다. 걱정대로 힘겨운 승리였으나 바이든 당선으로 미국이 정상을 되찾았다는 평가는 희망적인 요소다.

-“다 알면서.” 이수혁 주미대사는 6월 3일 워싱턴특파원 화상 간담회에서 “우리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국가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 발언 이후 자부심보다 논란이 더 커졌다. 이 대사가 주미대사보다는 주중대사 적임자라는 비아냥이 나왔다. 워싱턴을 방문한 일부 정부 당국자가 공식 브리핑 석상에선 “한·미 관계에 균열은 없다”고 강변하다가 이후 편한 자리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다 알면서”라고 말하는 모습도 이젠 그만 봤으면 좋겠다. 내년 1월 20일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다. 트럼프가 갔다고 해서 한·미 관계에 비단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니다.

-“설마, 미국에서?” 올해 미국의 단면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2월 초순이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19는 미국에서 먼 나라 얘기였다. 트럼프도 “날씨가 따뜻해지면, 열기가 이런 바이러스를 죽인다”면서 “이 바이러스는 4월에는 사라질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불안감은 스멀스멀 퍼졌지만, 알고 지내는 미국인들은 “설마, 미국에서?” 하면서 그래도 미국 시스템에 신뢰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압도적인 세계 1위다.

대선을 앞두고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트럼프가 대선 불복을 시사했을 때 “설마” 얘기를 또 많이 들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트럼프였다. 그는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나섰다. 대선 직전에는 내전 우려까지 나왔으나 트럼프의 불복 수위가 그나마 낮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코로나19와 트럼프의 대선 불복은 세계 최강대국에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렸다. 이틀 뒤에 올 새해에는 코로나19가 사라져 우울한 유화가 아니라 밝은 수채화 같은 날들만 가득하길 기원한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