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3년 뒤에도 살아남을 책

입력 2020-12-30 04:03

출판기업은 3년 뒤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단발성 기획으로 빨리 승부를 볼 수 있어야 하겠지만 호흡이 짧은 책만 펴내서는 길게 버티기 힘들다. 나는 2017년에 ‘요다’와 ‘플로베르’라는 출판 브랜드를 새로 등록했다. 요다는 서브컬처, 플로베르는 스낵컬처 전문 출판사로 키울 생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전략은 옳았다. 올해 출판시장에서 정통문화는 크게 쇠퇴하고 서브컬처가 완전히 시장을 장악했다. 무거운 책이 갈수록 팔리지 않는 가운데 젊은 세대는 가벼운 에세이에서 인생의 ‘지혜’를 찾기 시작했다.

20세기만 해도 인간은 책에서 지식을 갈구했다. 그러나 지금 인간은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검색부터 한다. 웬만한 지식은 스마트폰 검색으로 즉각 해결한다. 고성장 시대에는 남보다 빨리 지식을 챙기면 앞설 수 있었다. 시험을 잘 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면 남보다 빨리 전략정보를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인공지능(AI)과 경쟁해야만 하는 지금은 학력 사회가 아니라 학습력 사회다. 달리 말하면 상상력의 시대다. 남들이 상상해내지 못한 새로운 상품을 내놓거나 새로운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거의 모든 것을 독식하는 시대다.

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라! 수십년 경력자도 14살 어린이에게 나가떨어지지 않는가! 이렇게 개인의 삶에서도 ‘립프로그(leapfrog·개구리 점프)’ 현상이 늘 일어난다. 악조건에서 실력을 갖춘 사람이 한순간에 많은 사람을 건너뛰어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세상이다. 지금까지 견고했던 프레임은 ‘보텍스(vortex·소용돌이)’가 한 번 치면 순식간에 무너진다. 그러니 이제 개인은 어떤 소용돌이가 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올해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보텍스를 만났다. 세상은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익숙했던 과거로는 되돌아갈 수 없게 된 우리는 일상을 새롭게 구축해야만 한다. 특히 교육 현장에선 더욱 그렇다. 올해 비대면의 온라인 수업은 일상이 됐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테크놀로지 실업’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기술 하나가 수십만, 수백만명의 일자리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세상이다. 인간이 하던 일의 대부분은 AI가 대체하고 있다. AI가 기사를 쓰고, 방송도 하고, 진료도 한다. AI는 영화에서처럼 텔레메트리 기술로 빅데이터를 분석해 유일한 해답을 스마트폰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에 범람하는 트렌드 서적이 3년 뒤의 미래를 예측해줄까. 작년 말 출간된 수많은 트렌드 서적 중에서 코로나19의 등장을 알린 책은 한 권도 없었다. 그저 단편적 미래만 알려줄 뿐인 그런 책들을 읽어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상상력이 키워지지 않는다.

이미 세계 출판시장은 어린이·청소년 중심이다. 21세기 초부터 영미권에서 팔리는 소설은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읽으며 미래를 이겨낼 상상력을 키워주는 영어덜트 소설이 대세였다. 앞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의 상상력을 키워주는 책이 아니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인문사회과학 서적도 서브컬처 인문학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올해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어설픈 ‘온라인 수업’을 들으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교육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학교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미 변화를 선도하는 어른들은 아이들과 직접 한 권의 책을 같이 읽고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 일을 통해 학습력을 키워나간 사람이 미래를 주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3년 뒤에도 출판시장에서 살아남을 책은 무엇일까.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한 교과연계의 책이 아니라 오로지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상상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 하나의 사실만큼은 무조건 믿어도 좋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