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강물을 보며

입력 2020-12-30 04:02

하루에 한 번 이상, 주로 해질 무렵 집을 나서서 걷는다. 언젠가부터 산책이 중요한 일과가 됐다. 요즘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 걷는 시간도 더 늘어났다. 주로 골목과 시장을 걸으며 상점에 진열된 물건들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기웃거리는 편이지만 집 가까이 있는 강가를 산책하기도 한다. 강을 따라 만들어진 긴 산책로가 여간 고맙지 않다. 요새는 걷다가 멈춰서서 꽤 오래 강물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며칠 전에는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나무가 흔들리고 물결도 요란하게 출렁였다. 나는 강의 물결이 내가 아는 강의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남서풍이 불면 강물은 북동쪽을 향해 움직이는 물결을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강의 원래 흐름이 바뀌는 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강은 제 방향을 잃지 않고 정해진 제 길을 간다. 나뭇잎이나 종이배를 띄워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물결은 북동쪽으로 요동치는데 물 위에 뜬 나뭇잎과 종이배는 남서쪽을 향해 흘러간다.

바람은 물의 표면을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물결은 물의 무늬다. 바람이 약하게 불면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느린 물결 무늬를 만들고 바람이 세게 불면 빠른 물결 무늬를 만든다. 약한 바람이든 강한 바람이든 바람이 바꾸는 것은 물 표면의 무늬일 뿐이다. 강물의 내부는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고 흐른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강물을 오래 쳐다보았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런 날 물결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강의 표면이 너무나 조용해 흡사 강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강이라고 할 수 없다. 흐르지 않는 물을 강물이라고 할 수 없다. 물의 표면이 고요하다고 강이 멈춰 있는 건 아니다. 강은 바람이 불지 않는 날도 제 방향을 잃지 않고 제 길을 간다. 물결이 전혀 없는데도 물 위에 뜬 나뭇잎이나 종이배는 일정한 방향을 따라 흘러간다. 바람은 물의 표면인 물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 강물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강은 상류에서 하류로 흐른다. 바람이 하류에서 상류로 분다고 흐름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올 한 해는 참 요란했다. 시종 거센 바람이 불어대 물결이 요동쳤다. 온 세상이 한쪽으로 휩쓸려 갈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덩달아 마음이 사나워져 감정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린 날이 많았다. 바람이 아무리 요란하게 불고 물결이 요동쳐도 강물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기가 참 힘든 시간들이었다.

해가 저무는 저녁 강가에 서서 나는 한 해를 돌아보며 부끄러워한다. 바람이 부는 대로 요동치는 강물의 표면만 보고 강물이 반대로 흐르기라도 할 것처럼 부화뇌동하거나 조급한 마음을 먹고 흥분한 것 모두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강물의 표면만 보기 때문이라고 강물이 알려주는 것 같다. 강물의 내부가 보이지 않으니까 외부의 움직임만 보고 호들갑을 떤 것이라고. 바람은 물의 표면을 건드릴 뿐이고, 거센 바람은 물의 표면을 거세게 건드릴 뿐인데, 그 사실을 마음에 새기지 못했다고.

크고 깊은 강은 흐르지 않는 것 같은 순간에도 흐르고 있다. 크고 깊은 강은 물결이 거꾸로 움직일 때도 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크고 깊으면 그 안으로 바람이 쳐들어올 수 없다. 표면은 흔들리지만 심연은 흔들리지 않는다. 어떤 바람이 불든, 외부의 자극이 어떻든 개의치 않고 묵묵히 흐른다.

새해에도 바람은 여기저기서 불 것이다. 어쩌면 더 요란할 수도 있다. 한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 강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요동치지 말자고.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물결을 따라 흔들리지 말자고. 어떤 바람도 강의 흐름을 어쩌지는 못하니 단단하고 굳세자고. 무겁고 깊어지자고.

이승우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