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성산일출봉

입력 2020-12-30 04:05

새해 첫날에는 모두가 일출 앞으로 모인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고 소원을 빈다. 가족, 연인, 친구들과 덕담을 주고받은 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제주 성산일출봉 근처에 살면서 이러한 광경을 새해가 아닌 평상시에도 자주 보았다. 태풍 때문에 한 걸음조차 내딛기 힘든 날씨에도, 그리고 장맛비가 무섭게 쏟아지는 날씨에도 사람들은 소원을 빌기 위해 성산일출봉 앞으로 모였다. 이들의 열정을 보면서 나도 일출을 향해 소원을 빌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달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성산일출봉 앞 벤치에 앉아서 매일 밤 달을 기다렸다. 그러다 달이 뜨면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 우스운 생각이지만 일출은 많은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느라 나의 소원에 집중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가하고 외로워 보이는 달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소원뿐만 아니라 주저리주저리 수다를 떨기도 했다. 이곳에서 달을 보며 말을 거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달은 마치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숨소리까지 전달되는 기분에 매일 주인공이 된 것처럼 소원을 빌었다.

실제로 달에게 빌었던 소원 가운데 하나만 빼고 모든 소원이 이뤄졌다. 남은 하나의 소원도 천천히 이뤄지는 중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빌었던 수많은 소원 중 달에게 빌었던 소원이 가장 많이 이뤄졌다. 달은 정말로 나의 소원을 이뤄주는 것일까. 지금까지도 나는 달을 향해서만 소원을 빌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번에도 새해의 첫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 계획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실천할 겸 일출이 시작되는 시간에는 늦잠을 잘 것이다. 그러다 밤이 되면 창문을 열고 새해의 첫 달을 보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고 간절히 바라는 소원을 빌 것이다. 이번 새해맞이는 모두가 동해로 떠나 해돋이 명소를 찾기보다 각자만의 방법으로 안전하게 보냈으면 좋겠다.

이원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