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에서 집을 바라보니 아내와 다섯 살짜리 큰아들이 보였다. 나는 뛰다시피 해서 대문을 열었다. 아내의 표정은 놀랍게도 담담했다. 잠시 출장 다녀온 남편을 맞는 것 같았다. 세 살배기 둘째 딸과 갓 태어난 셋째 아들도 집에 있었다. 내가 “피난을 같이 못 가 미안하다”고 하자 아내는 “같이 갔더라도 이 셋을 데리고 어떻게 살았겠느냐. 하나님이 잘 지켜주셨다”고 말했다.
아내는 다행히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전투가 있는 동안에는 두 아이 손을 잡고 한 아이는 업은 채 산 아래 방공호로 대피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방공호로 가는 걸 싫어해 나중엔 마루방 밑에 낮은 구멍을 파고 거기로 몸을 피했다고 했다. 피해를 본 건 포탄 조각이 박힌 나무 담장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큰놈은 “왜 이렇게 팡팡하는 소리가 나지”하면서 나를 찾은 모양이다. 아내가 “아버지는 여기 있으면 안 돼서 멀리 갔다가 온다”고 말해준 덕에 자녀들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귀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 두 명이 집에 찾아왔다.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는 열차가 있으니 군복을 입고 고향에 가보자고 했다. 제자들과 함께 평양행 열차를 타고 대동강 동쪽에서 내렸다. 전투의 흔적이 남은 철도 주변엔 생기 잃은 북한 주민이 내가 탄 열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 대동문 근처에 내린 뒤 미군 군용 지프에 동승해 송산리에 도착했다. 집에는 부모와 두 남동생, 막내 여동생과 38선 남하 때 데려오지 못한 큰딸 성혜가 있었다.
얼마 뒤 송산리 집에 제자가 다시 왔다. 중공군이 참전해 아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서둘러 두 남동생과 여동생, 큰딸을 데리고 만경대에서 역포까지 갔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로 뒤따라오라며 큰동생을 다시 송산리 집으로 보냈다. 우리는 군용열차 석탄 칸을 타고 수색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남하로 곧 온 가족이 부산으로 떠나야 했다. 1951년 1·4 후퇴였다. 부산행 열차를 타고 부산진역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내가 머물렀던 교회에서 지냈다.
문제는 송산리로 되돌아간 큰동생과 부모님이었다. 큰동생에게 서울 신촌집으로 오라고 했기에 다시 서울로 올라갔지만, 집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부산 대연리 교회로 오라’는 쪽지를 남기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해 12월이 끝나갈 때까지 동생의 기별은 오지 않았다. 나는 동생의 무사 귀환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
그해 12월 마지막 날이었다. 저녁에 예배당에서 나오는데 밖에서 “이 예배당에 김형석 선생 가족이 있습니까”란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과 모친이었다. 비록 부친은 모시지 못했지만, 다른 일행도 함께 데려왔다. 방금 나는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희망의 소식을 전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 참이었다. 기도를 들어준 주님께 감격해 눈물이 났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