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종 개시 美·유럽 ‘백신 여권’ 잰걸음… 불평등 심화 우려

입력 2020-12-29 04:02
영국 맨체스터 공항 검사소 표지판 앞을 지나는 여행자. 로이터연합뉴스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개시한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을 중심으로 접종 여부를 증명하는 ‘백신 여권(vaccine passport)’ 개발 작업이 한창이다. 백신 여권이 선진국과 저개발국가 간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미국 CNN방송은 27일(현지시간) “몇몇 기업들과 기술 그룹들이 코로나19 검사 및 백신 접종 여부에 대한 개인 정보를 업로드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 국가 안에서 사무실, 영화관, 경기장, 콘서트장 등 공공장소에 출입할 때는 물론이고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국경을 넘나들 때 백신 접종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개인의 데이터를 담은 ‘디지털 자격 증명서’를 개발하려는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의 비영리단체 코먼스 프로젝트와 세계경제포럼(WEF)은 백신 여권에 활용될 ‘코먼패스’ 앱을 개발 중이다. 사용자가 병원 등 의료기관에서 받은 백신 접종 기록을 이 앱에 올려두면 민감한 개인정보가 제거된 통행증이나 의료 증명서가 QR코드 형태로 발급된다. 각국의 보건 당국은 출입자가 제시한 QR코드를 바탕으로 출입 자격을 부여한다.

코먼스 프로젝트의 토머스 크램튼 홍보담당자는 CNN에 “국경을 넘을 때마다 코로나19 검사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국경을 넘을 때마다 백신을 맞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프리카 여행 시 황열병 백신 접종 증명서인 ‘옐로 페이퍼’를 제출해야 하는 점을 거론하며 “백신 여권은 디지털 옐로 페이퍼가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캐세이퍼시픽·루프트한자·유나이티드항공·버진애틀랜틱·제트블루·스위스항공 등 주요 항공사들과 수백개의 의료법인이 이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BM 같은 거대 정보기술(IT) 기업들도 백신 여권 개발에 뛰어들었다. IBM은 ‘디지털 헬스 패스’라는 자체 앱을 개발해 자사 사업장에 출입하는 이들이 코로나19 검사, 백신 접종 여부 등을 등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백신 여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먼저 백신 확보량과 접종 속도에서 국가별로 격차를 보이는 상황에서 백신 여권이 도입되면 국가별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미 비영리단체 전자프런티어재단은 “백신 여권은 불평등의 도장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부가 앞장서 백신 여권을 가진 이들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고 결정한다면 개인의 자유가 심각히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백신 여권이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데 얼마나 효과적일지 알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스탠퍼드대 전염병 전문가 줄리 파슨넷 박사는 “백신을 맞은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전염시킬 수 있는지 없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면서 “이것이 명확해질 때까지는 백신 여권이 효과가 있을지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