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지난해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제시한 대체입법 시한이 오는 31일로 다가왔다. 하지만 국회가 입법에 나서지 않으면서 법적 공백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법안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내년 1월 1일부터 임신의 모든 과정에 걸쳐 태아의 생명을 전혀 보호할 수 없게 된다. 국회의 본분인 입법을 하지 않음으로써 인간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빚어지는 것이다. 직무유기도 여간 심각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이를 보다 못해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낙태죄 존치 입법을 바라는 국민동의청원이 국회에 제출됐고, 28일 10만명의 동의를 얻어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와 보건복지위에 회부됐다. 천주교에서도 염수정 추기경이 이날 박병석 국회의장에게 조속한 입법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국회에는 정부안을 비롯해 이미 여러 대안이 제출돼 있다. 정부안은 임신 14주 이내 여성에게만 낙태를 허용하고, 15~24주 여성은 사회·경제적 이유가 있는 경우에 한해 낙태할 수 있게 했다. 국민의힘조해진 의원이 낸 안은 임신 10주까지만 낙태를 허용했고, 여성계의 입장을 대변한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 안은 낙태죄 완전폐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법사위 등은 이달 초 한 차례의 공청회만 한 뒤 입법에 아예 손을 놓고 있다. 특히 법사위는 회의 때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갈등을 놓고 정쟁만 일삼느라 허송세월했다.
입법 지연은 여당이 여성계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느라 소극적인 태도로 나서고 있기 때문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정부와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집권당이 입법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해 제출된 정부안마저 계속 뭉개고 있는 것은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현재 종교계는 낙태죄를 존치시키고 낙태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여당이 입법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종교계 목소리는 일절 무시하고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계의 손만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꼴이 된다. 그런 상태가 장기화하면 자칫 생명경시 풍조가 확산되고, 일부 여성들의 경우 낙태를 종용당하는 일이 생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사태를 막으려면 여야가 지금이라도 머리를 맞대 다음 달 8일까지인 12월 임시국회 회기 내에라도 반드시 법을 만들어야 한다. 제출된 법안들에 차이가 크지만, 태아의 생명권이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바탕 위에서 절충점을 찾으면 해법이 도출될 수 있으리라 본다.
[사설] 태아 생명권 저버리는 국회의 직무유기
입력 2020-12-29 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