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칼과의 싸움을 멈출 때다

입력 2020-12-29 04:04

과거 정권 청와대 비서관이 들려준 일화다. “큰 사안이 벌어지면 청와대에서 대책회의를 합니다. 보통 회의에는 정무, 민정, 홍보 관련 비서관들이 참석하는데, 검찰 출신 민정 비서관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매번 똑같습니다. ○○○은 이런 일로 구속할 수 있고, XXX은 저런 일로 구속할 수 있다고 합니다. 대책을 논의해야 하는데, 전부 구속할 수 있다는 얘기만 하니 대책을 마련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청와대 내부 회의 풍경을 알려주다가 나온 농담이었는데, 그럴듯한 얘기여서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국가의 중요한 일들은 대개 정치적으로 해결돼야 한다. 여론을 듣고, 이해관계를 살피고, 갈등을 조정하고 적절히 타협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칼’에 비유되는 검찰의 문제 해결 방식은 대부분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의 해법으로는 낙제점일 수밖에 없다.

문재인정부는 집권 후 정치의 많은 부분을 칼에 의지했다.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겠지만, 정치적으로 해결했어야 할 일도 칼을 동원했다. ‘윤석열 검찰’은 문재인정부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었다. ‘적폐수사’라는 이름으로 전직 대통령 2명을 감옥에 보내고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 장관들을 쳐냈다. ‘사법농단’의 이름으로 대법원장과 고위 법관들을 감옥에 보냈다. 미당 서정주는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윤석열 검찰을 키운 건 팔할이 문재인정부였다.

칼에 의지하던 문재인정부의 기조가 달라진 시점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부터였다. 과거를 향했던 칼이 자신들에게 겨눠지자 문재인정부 사람들은 칼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정권 출범 이후 2년간 칼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줬던 사람들이 갑자기 “너무 날카롭다”며 칼을 탓했다.

조 전 장관은 지난 10월 “칼은 잘 들어야 한다. 그러나 칼잡이의 권한과 행태는 감시받고 통제돼야 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맞는 말이다. 칼잡이의 권한과 행태는 감시받고 통제돼야 한다. 다만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 ‘책임’ 소재다. 칼잡이의 칼을 제어하고 통제할 책임은 권력에 있다. 윤석열 검찰의 칼잡이들이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를 때 이를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었다. 문재인정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석열 검찰을 격려하고 칭찬했다. 그러다가 감시와 통제를 얘기하며 칼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도구를 다루는 사람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도구를 탓한 것이다. 문재인정부는 첫 2년 동안 칼을 방치했고, 나머지 1년은 칼과 싸웠다. 결과는 지금과 같은 카오스 상태다. 검찰 조직은 망가졌고, 정권마저 위기에 몰렸다.

늦었지만 이제 칼 탓은 그만할 때가 됐다. 칼과 싸우는 것을 멈추고 칼을 통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칼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을 방법은 결국 제도와 인사다. 많은 우려와 비판이 있으나 출범을 앞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후임 법무부 장관이 두 번째 단추고, 검찰 인사가 세 번째 단추다. 검찰 내부에서도 인정받고, 정치권에서도 여야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인사들로 빈 공간을 채워야 한다. 지금과 같은 혼란을 끝내려는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공수처를 윤석열 검찰을 쳐내기 위한 또 다른 칼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추미애 장관이 세 차례 인사를 통해 자기 사람들로 검찰을 채웠지만 결과는 모두 아는 대로다. 공수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 대통령의 사과가 있었던 지난 25일,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대통령 메시지는 수습과 안정에 방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 수습의 실력을 보여줄 때다.

남도영 편집국 부국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