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공산군의 남침 소식이 뉴스로 전해졌다. 그런데도 이날 오후 덕수교회엔 성경공부를 위해 모인 중앙학교 제자들이 꽤 있었다. 예배와 강의를 마친 뒤 나는 “이번 전투는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다음 주부터는 모임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안과 절망을 안고 뿔뿔이 흩어져 돌아가는 제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들이 무사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이들의 운명을 오롯이 하나님 아버지께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성경공부 모임에는 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나를 체포하기 위해 온 학생도 있었다. 중앙중학교 교사 중 공산당 책임자가 있었는데, 그를 중심으로 한 조직에서 제자 E를 첩자로 삼았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당 조직에서는 교사를 A급과 B급으로 구분했다. A급은 제거 대상이고, B급은 구속 심사 대상이었다. 반공 운동에 앞장선 나는 A급이었다. 제자 E는 전쟁 발발 후 나를 체포하려고 우리 집에 두 차례 찾아왔지만, 헛걸음이었다. 내가 27일 밤 홀로 피난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전쟁은 온 국민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전쟁이 난 지 3일 만에 내가 사는 신촌 이화여대 뒷산에 인공기가 꽂혔다. 당시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테이프만 믿고 집을 지켰다. 그날 나는 유용한 정보를 얻을까 싶어 밤새 거리를 헤매다 같은 교회의 이북 청년과 제자를 만나 그길로 떠났다.
빗길을 헤치며 한강에 가보니 다리가 폭파돼 끊어져 있었다. 이튿날 다시 피난길에 오를 여유가 없었다. 그날 밤 나룻배 뒤를 따라 헤엄쳐 한강을 건넜다. 경기도 수원을 지나 오산까지 걸어가면서도 머잖아 신촌 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빈민가에서 하루를 묵은 뒤, 이틀을 더 걸어 충남 온양을 거쳐 홍성까지 갔다. 이때도 며칠 뒤엔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우리는 다시 먼 길을 걸어 임시정부가 있는 대전으로 갔다. 대전도 위태롭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 남하하기로 했다. 전남 목포나 광주로 갈까 생각했지만, 대전역에서 만난 지인을 따라 부산행 화물차를 탔다. 이때 우리 정부가 부산으로 간다는 소식을 못 듣고 전남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면 또 한 번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것이다.
부산에서 내가 지낸 곳은 대연리의 작은 교회였다. 이곳에서 3개월간 머물다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가 10월 초쯤이었다. 열차를 타고 노량진에 내려 한강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북에 들어섰다. 나는 가슴을 졸이며 집이 있는 노고산 쪽으로 걸어갔다. 이곳이 격전지로 뉴스에 보도됐기에 긴장감은 더했다. 언덕에 올라 집이 있는 쪽을 보니 앞집과 뒷집, 옆집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저 우리 집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