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 삼송역 부근에 ‘밥할머니 공원’이 있다.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의 숨은 영웅 밀양 박씨 밥할머니를 기리는 곳이다. 3000명도 안 되는 조선 병사들이 왜군 3만명을 물리친 기적 같은 일은 밥할머니 같은 민초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어 가능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군사 업무를 관장하는 도체찰사였다. 그는 ‘징비록’에서 그때 참상을 뼈아프게 기록하고 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을 침공했다. 조선 군사는 도망가기 급급했다. 적군은 우리 강산을 마구 유린했다. 명나라가 ‘아무리 왜군이 강하다 해도 이렇게 빨리 올 수는 없다. 조선이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이끌고 온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할 정도였다. 4월 30일 임금이 피난길에 나서자 백성들이 길을 막았다. 일부 흥분한 사람들은 경복궁 등 궁궐들을 불살랐다. 선조가 평양성을 버리고 도망칠 때도 민심이 흉흉해졌다. 그러자 임금 이름으로 결사 항전을 공언했다. 이미 성을 빠져나갈 것을 결정해놓고 ‘대국민’ 거짓말을 한 것이다.
기댈 곳은 명나라뿐이었다. 우리 사신들은 명나라 실력자 집에 가서 울부짖으며 구원병을 애걸했다. 마침내 그해 7월 명나라 군사가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이들이 남의 전쟁에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있었겠는가. 걸핏하면 철군 타령을 했다. 대장 이여송은 군량미가 제때 조달되지 않는다고 조선의 장관급 인사들을 뜰 아래 꿇어 앉히고 큰소리로 야단쳤다. 서애 선생은 밖에서 비를 맞으며 저들의 심기를 달래기도 했다. 심지어 곤장을 맞을 뻔한 일도 있었다. 나라 모습이 어떻게 하다 이 지경이 됐는지 한심한 생각에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년 6월 첫 승전고를 울렸고 반년 뒤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격퇴했다. 이 무렵 밥할머니의 활약이 눈부셨다. 왜군의 기를 꺾기 위해 북한산 노적봉에 볏짚을 쌓아 군량미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다. 창릉천에 횟가루를 뿌려놓고 쌀뜨물이라고 속였다. 이 물을 마신 적군이 배탈이 나서 뒹구는 사이 우리 군대가 급습했다. 행주산성에서 마을 여인들을 모아서 상군(裳軍), 즉 ‘치마부대’를 조직했다. 우리 병사들에게 주먹밥을 제공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해주었다. 봉홧불을 올리는 전령 역할도 했다. 실탄이 떨어지자 치마에 돌을 담아 나르기까지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정에서 노적봉이 잘 보이는 곳에 밥할머니의 석상을 만들어 기념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석상은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일제 강점기 때 머리 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014년 고양시 주민들이 석상을 모셔 향토문화재로 지정하고 기념 공원을 만들었다. 매년 10월 ‘고양의 잔 다르크’를 기리는 제향도 드린다.
‘징비록’이 증언하듯이 개전 초기 조선의 장수들은 하나같이 겁쟁이였다.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러나 전국의 의병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임진왜란이 터진 그다음 해 전국 의병 수가 2만2000명이 넘었다. 임금이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간 사이 밥할머니 같은 보통 사람들이 나라를 지켰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야 한다. 위정자들은 여전히 국가는 안중에 없다. ‘무능하고 비겁한 군주’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자기 보신이 우선이다. 없는 말 지어내 상대를 모함하고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행태는 어쩜 그리 하나도 바뀌지 않았을까. 서애 선생이 통탄할 일이다.
공원 옆 칼국수집에 들렀는데 그 큰 매장에 손님이 하나도 없다. 주인아주머니는 비상시국인데 다 같이 참아야지 어떡하겠느냐고 했다. 그날 밤늦게 후배 교수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만취한 듯했다. 그는 수년 전 광화문 촛불시위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펑펑 울었던 사람이다. ‘나라 꼬락서니’가 또 이 모양이라 참을 수가 없다고 한다.
자조(自嘲)는 금물이다. 대나무에는 마디가 있다. 마디가 없으면 꺾이고 만다. 대나무는 그 매듭을 만드는 힘으로 자란다. 그렇다. 지금 대한민국은 임진왜란 때 그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보통 민족이 아니다. 시련이 닥치더라도 또다시 이겨낼 것이다. 올 한 해 우리는 의료 현장과 생업 전선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킨 사람들 덕분에 내년을 기약할 수 있게 됐다. 올해의 영웅은 마스크를 쓴 국민 여러분이다. 400년 전 서애 선생의 눈물을 밥할머니가 닦아 주었다. 역시 국민이 주인이다.
서병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