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석 (11) 중앙중·고서 7년간 교편… 학교 밖에선 성경공부

입력 2020-12-29 03:01
김형석 교수는 1947년부터 7년간 서울 종로구 중앙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학교 설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인촌 동상이 세워진 중앙고 본관 모습.

서울에 도착해선 신촌 기차역 인근에 정착했다. 작은 방을 하나 얻었는데, 가진 게 하나도 없었다. 여벌 옷이 없어 잠들 때도 외출복을 입고 자야 했다.

급선무는 직장을 잡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가 새 출발을 주님께 의탁하며 기도했다. 아내 역시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 나 같은 처지의 사람이 택할 만한 직업으로는 교육계가 제1순위였다. 기독교 계통의 중·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지원했지만, 좀처럼 길이 열리지 않았다.

하루는 신문에서 중앙중학교(현 중앙중·고등학교) 기사를 읽었다. 큰 기대 없이 계동의 긴 골목 끝에 있는 학교로 찾아갔다. 심형필 교장을 뵙고는 “북에서 월남했는데 교육계에 몸담고자 한다”고 말씀드렸다. 심 교장은 교감에게 나를 소개하며 “함께 일할 뜻을 가진 것 같은데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이렇게 나는 1947년 10월 2일 중앙중학교 교사가 됐다. 7년간 이곳에서 교편을 잡으며 많은 걸 배웠다. 그중에서도 인촌 김성수(1891~1955) 선생과 인연을 맺은 걸 가장 큰 혜택으로 여긴다. 나는 취직한 뒤에야 중앙중학교가 인촌이 고려대와 함께 운영하는 명문 사립학교란 걸 알았다. 그 정도로 대인관계가 넓지 못하고 누구나 가진 정보에도 어두울 만큼 우둔한 편이다. 이런 내가 중앙중학교를 통해 인촌과 친분을 맺은 건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일이다. 그가 만년에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는 침묵 가운데도 서로 통하는 걸 느꼈다. 한 분 구세주를 같이 믿는다는 사실에 정신적 유대감을 느꼈으리라.

지금도 나는 인촌을 존경한다.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과 더불어 많은 가르침을 준 고마운 분이다. 그는 애국심과 지혜로움을 갖춘 인물이었다. 일각에선 친일파라고 비난하지만, 옳지 않다. 인촌만큼 민족과 국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한 분도 흔치 않다. 그는 도산이 병중에 있을 때, 일제의 감시 아래서도 도움을 주곤 했다. 인촌은 병을 얻으면서 신앙을 갖게 됐는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 친지와 가족에게 신앙을 권했다.

중앙중학교에서 일하며 얻은 큰 즐거움은 우수한 제자를 여럿 만났다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 캐나다 유수 대학의 교수로 있는 제자들만 20명 가까이 된다. 정진석 추기경과 민경배 연세대 명예교수도 우수한 제자로 기억한다. 좋은 제자를 많이 갖게 해 준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리스도인 교사로서 제자에게 지식뿐 아니라 신앙적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학교 교육의 순수성을 저해하고 학교 운영에 어려움을 줄까 우려해 일부러 일요일 오후 외부 공간에서 모임을 했다. 새문안교회에선 대광고 학생을, 덕수교회에선 중앙중학교 제자를 대상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열었다. 하지만 모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