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올해를 기억하는 방식

입력 2020-12-28 04:01

마스크로 시작한 한 해는 기어코 마스크를 쓴 채 저물어 간다. 마스크를 깜빡하고 밖에 나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오는 일도 이제는 거의 없다. 가방마다, 주머니마다 있다. 혹시나 끈이 떨어질까 봐 여분을 챙겨두기도 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과태료를 내야 하는 시절이다.

마스크는 언제나 곁에 있는데 사람들은 자꾸 멀어져 간다. 연말 모임은 줄줄이 취소됐고, 아쉬움의 자리는 체념이 채웠다. 계획했던 일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취소해야 할 때의 상실감은 잘 익숙해지지 않는다. 티켓 예매가 열리는 시간에 알람을 맞춰가며 떨리는 손으로 클릭했던 콘서트는 연기됐고, 돌을 앞둔 친구의 어린 조카를 보러 가는 일도 내년으로 미뤘다. 연말에 남은 휴가로 가려 했던 제주 여행은 항공 예약도 하기 전에 포기했다. 급기야는 실내외에서 5명 이상 모이면 안 된다는 행정명령까지 떨어졌다. 할 수 없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이 늘어난다.

올해를 기억하는 방식은 전 세계인이 비슷한 것 같다. 미국 타임지는 2020년을 올해 최악의 해라는 뜻으로 2020이라고 적힌 숫자 위에 X 표시를 한 그림으로 표지를 장식했다. 트위터가 ‘2020년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이라고 남긴 트윗에는 유수의 기업들이 ‘ctrl+z’(이전으로 돌아가기) ‘delete’(삭제) ‘skip(건너뛰다)’ 등의 반응을 달았다. 다들 지워버리고 싶고,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해였다는 뜻일 테다.

올해는 어쩌면 너무 많은 사람을 비난하며 보낸 한 해로 기억될 수도 있겠다. ‘이 시국’에도 목욕탕에 가고, 클럽에 가고, 스키장에 가는 이들을 욕하기에 바빴다. 모르는 새 너무 많은 사람을 미워한 건 아닌지 돌아본다. 불화하는 마음들은 한데 모여 다툼을 만들었다. 누군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가 싸움이 벌어졌다는 뉴스는 이제 새롭지도 않다.

이탈리아 소설가 파올로 조르다노는 책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에서 “정상적인 일상이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생각의 시간’으로 이 시기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공백으로만 여겨지는 이날에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하자는 거다.

지난해로 시곗바늘을 돌려보면 많은 사람 속에서 신나게 웃고 떠들던 모습이 지나간다. 그 소중함을 알기에 우리는 ‘정상적인 일상’이 돌아왔을 때 하고 싶은 일들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더운 날에는 바다나 수영장을 찾아 맘껏 수영하고, 추운 날에는 찜질방에서 사우나를 하는 아주 일상적인 바람들.

올해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미소가 나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스크 위로 눈웃음 짓는 얼굴들, 전염병이 다 무어냐는 듯 계절마다 색깔을 달리하는 나무들,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의 구름들. 올해로 기억되는 기분 좋은 장면 하나쯤은 마음에 담아둬야 내년을 또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 블루, 그러니까 코로나로 인한 우울증을 떨쳐내는 방법 중에는 관련 뉴스에 너무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적당히 경각심을 가지되, 겁먹어서 좌절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건 경계하자는 거다. 매일매일 확진자 수를 확인하고, 사망자 수를 세는 건 조심하는 마음보다 무섭고 무기력한 마음을 갖게 하기 쉽다. 비관적인 생각은 건강한 마음을 자꾸 좀먹는다.

계획했던 일이 틀어졌을 때 느끼는 상실감만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을 때 드는 감정은 배가 된다. 백신이 너무나 성공적으로 작동해서 순식간에 전염병이 사라진다는 상상은 잠깐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내년 언제쯤에는 여행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발리, 치앙마이, 삿포로 같은 도시에서 여행자가 돼 골목 어귀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마스크 없이 맘껏 떠들고, 다닥다닥 붙어 누군가의 온기를 느끼고, 밤늦게까지 환한 불빛으로 밝힌 거리를 걷는 것. 상상할수록 그런 날은 머지않은 것만 같다.

심희정 온라인뉴스부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