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홀몸에서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마무리되지만 이 부부공동체는 창조의 완성이 아니다. 그야말로 창세기의 첫 부분, 즉 시작의 시작일 뿐이었다.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노아에 이르러 가족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아브라함에 이르러서는 친족공동체가 형성된다. 이것은 다시 모세에 이르러 민족공동체로 성장하였다가 다윗에 이르러서는 국가공동체로 확대된다.
예수님은 이 국가라는 울타리조차 걷어버리고 온 인류가 하나가 되게 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 얼마나 멋진 선언인가.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들만 하나 되는 것으로 멈출 수 없다. 십자가의 피는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골 1:20) 했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자연을 신격화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사랑과 돌봄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근래에 이르러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환경’이라는 용어보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적 관계를 존중하는 ‘생태’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세상은 이 성경의 흐름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경제적 이익을 위한 생태계 파괴는 감염병과 기상이변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정면 대결 양상이다. 세계는 진영에 따라 여러 조각으로 블록화되고 문화충돌과 무역전쟁으로 몸살을 앓는다. 아직도 가난한 나라의 재화가 부자 나라들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착취적 구조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국가는 끊임없는 당파싸움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소수 특권층이 금융자산을 독점하는 동안 다수의 서민은 작은 파이의 한 귀퉁이를 붙들고 기약 없는 경쟁의 현장에서 바장거리고 있다. 대가족이 소가족, 핵가족으로 뿔뿔이 흩어지다가 이제는 미혼, 비혼, 이혼으로 형성되는 1인 가구가 30%를 넘어서고 있다. 젊은이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결혼과 출산조차 회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과 북, 보수와 진보, 기득권과 비기득권, 부자와 빈자, 여자와 남자, 다수와 소수 등, 그 분쟁의 중심에 화해와 평화의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 성도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함석헌옹은 그렇게 말했다. “전체가 아니면 하나가 아니다.” 전체가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것은 다르면서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거기엔 사랑과 평화가 절대적이다.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기에 하나님이시다.
세상에 사라져야 할 인간은 없다. 사라져야 할 생각과 행위가 있을 뿐이다. 세상에 사라져야 할 어둠은 없다. 있어야 할 빛이 없을 뿐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사라진다. 그것이 이원론을 극복하는 길이다. 실체도 없는 어둠을 향해 싸우지 말자. 그것을 미워하고 증오할 힘이 있으면 힘써 진리의 빛을 비추고 정의로운 선을 위해 사랑으로 헌신해야 할 뿐이다. 진리를 따라 살지도 않으면서 어둠이라고 악이라고 증오하고 공격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렇게 증오하고 공격하는 것이 바로 악이다.
이제부터는 서로 비난을 멈추고 상대의 좋은 것만 말하자. 이제부터는 각자가 자기 자랑을 멈추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만 고백하자. 꼭 따져야 하는 시시비비는 법정에서만 하고 법정 문 앞에 나오면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함께 가자. “땅에는 평화….” 이 성탄의 계절에 오늘도 기도한다.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7)
유장춘 (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