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절기상 밤이 가장 길고 낮이 짧아 팥죽을 쑤어 먹거나 집안 곳곳에 팥을 두어 악귀를 쫓는다는 동짓날이었다. 우주의 비밀을 밝히고 자율주행자동차가 나오는 21세기에 무슨 귀신 타령이냐 싶어 바쁜 생활을 핑계로 그냥 넘기려니, 아이가 이번 동지는 ‘애동지’라며 수수팥떡을 먹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동지가 음력 11월 10일 이전이면 ‘애동지’라 하여 아이들이 팥죽 대신 팥떡을 먹어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나 뭐라나.
직접 만들 정신은 없고 외출이 조심스러워 고민하다, 근처에 방앗간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퇴근 차림 그대로 아이와 함께 서둘러 가보았다. 다행히 가게가 문을 닫기 전이라, 맛볼 만큼만 사자 싶었는데, 시루에 가득 쌓인 떡을 정리하며 요즘은 떡도 잘 안 팔린다는 주인의 한숨 섞인 말에 그만 세 보자기를 집어 들고 말았다.
떡 봉지를 두 손에 나눠 들고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아이와 나는 수백년 만에 목성과 토성이 일직선에 서는 세기의 현상을 이야기하며 걸었다. 서양에서 ‘크리스마스 별’이라고 하는 저 먼 우주의 일과, 이 춥고 긴 겨울을 이겨냈던 우리 선조들의 풍습을 같이 이야기하자니, 어두운 골목 풍경마저 왠지 시공간을 초월한 우리만의 우주 같았다.
재미있는 추억을 쌓는 건 좋다만 이 많은 떡을 어쩌나 하고 슬슬 현실적인 생각이 들던 차에 시장 골목 사이로 예전 단골집들이 보였다. 똑똑 문을 두들기자 다들 환하게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반겼다. 아이가 어렸을 때 삐뚤빼뚤 그림을 배우던 곳에 한 보자기, 늦은 시간에도 우리 부부의 허기를 채워주던 동네 식당의 젊은 사장님 내외에게도 한 보자기를 건넸다. 악운을 쫓는다는 붉은 팥떡을 나누며 마스크로도 숨겨지지 않는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자니, 어느새 추위마저 누그러진 듯했다. 어쩌면 우리 선조들도 뜨끈한 팥죽과 떡을 이웃과 나누어 먹으며 긴긴 겨울밤을 따듯하게 밝히려 했던 것은 아닐까.
배승민 의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