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인 한 해였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코로나19가 국민의 일상을 삼켜버렸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구호의 손길이 많이 필요했다. 환자를 돌보는 최전선에 있는 의료진에게는 정성껏 만든 도시락이, 고통과 우울감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겐 시집과 허브차 반려식물 등으로 구성된 힐링 키트가 보내졌다. 생활치료센터에 전해진 생필품 키트는 유튜브에 언박싱(상품의 상자를 개봉하는 과정) 영상이 소개되면서 해외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다.
코로나19만 있었던 건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올여름 장마는 유례없이 길었다. 장마가 지나자 태풍이 연달아 강타했다. 이재민을 위한 대피소에는 어느새 칸막이와 간이침대, 생수와 음식이 전달됐다. 이 모든 구호의 중심에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이하 희망브리지)가 있었다. 희망브리지는 올해 코로나19 국민 기부금으로 974억원 이상을 모았다. ‘사랑의열매’로 알려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보다 20억원 정도 많고, 대한적십자사와 비교하면 2배 이상 많은 금액이다. 많은 이들이 성금을 낼 때 내 돈을 어디에 보내야 투명하게 잘 전달될까 고민한다. 희망브리지는 가장 많은 기업과 개인이 선택한 단체다.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광흥창역 인근에 위치한 전국재해구호협회에서 김정희(57) 사무총장을 만났다. 그는 짧은 기자생활을 마치고, 밀레니엄을 준비하는 새천년준비위원회 홍보팀장을 거쳤다. 훗날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보기 위해 늦깎이로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2018년 6월 공모로 사무총장에 채용됐다. 강원도 산불, 수해, 태풍, 코로나 등 여러 재해 현장을 휴일 없이 누볐다.
-희망브리지가 내년에 창립 60주년을 맞는다. 어떻게 설립됐나.
“예전에는 반복되는 자연재난 때 이재민 구호를 전담할 기관이 없었다. 여러 곳에서 모금된 수재의연금 등을 한꺼번에 관리하고 배분해야 할 기관이 필요했다. 1959년 태풍 ‘사라’를 계기로 언론사와 사회 각계가 함께 1961년 7월 전국재해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이후 2001년 재해구호법이 개정되면서 희망브리지는 법정 구호기관이 됐다. 언론계가 주축이 된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모금 구호기관으로, 각 언론사 사장이 이사를 맡고 있다. 수해나 태풍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언론사에서 성금을 모금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순수 민간단체로 정부 보조금을 전혀 받지 않는다. 그동안 총 1조5000억원의 성금을 모아 5000만점 넘는 물품을 지원했다.”
-희망브리지에 부임한 뒤 주력한 일은.
“규모 면에서는 인원(40명)이 적고 지부도 없지만 재난을 다루는 일을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기관이라고 생각한다. 성금을 모으는 것뿐 아니라 재난구호 현장에서 직접 지원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군인이나 경찰처럼 항상 대비하고 24시간 대기하는 조직이다. 사무총장으로 온 뒤 직원들에게 생각을 먼저 바꾸자고 했다. 무조건 ‘노’라고 하지 말고 일단 ‘해보자’라고. 피해 조사를 기다리지 말고 태풍이 오는 경로에 미리 구호팀을 보내 자주 바뀌는 재난 담당 공무원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선제적인 안내를 했다. 재해구호 관련 전문적인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도 했다. 재난연구소의 연구위원을 대폭 확충해 재난과 관련한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더 알려진 단체보다 기부금을 더 많이 모았다. 비결이 무엇인가.
“그동안 수많은 재난에서 희망브리지가 보여준 진정성과 전문성이 빛을 발했다고 본다. 대구지하철 참사, 연평도 포격, 세월호 참사, 포항 지진, 강원도 산불 등 큰 피해가 난 재난은 물론 종로 고시원 화재 등 비교적 작은 재난에도 희망브리지는 현장에 달려간다. 이재민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국민 성금으로 만든 구호물품을 전달했다. 이런 활동 하나하나가 국민과 기업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것 같다. 그 결과 올해 삼성 등 많은 기업이 사회공헌 파트너로 희망브리지를 선택했다. 유재석, 봉준호, 송강호, 방탄소년단 슈가, 류현진, 손흥민 등 유명인들도 1억원씩 성금을 맡겨왔다. 일곱 살 꼬마부터 80세 어르신까지 일반 시민이 100억원 가까운 성금을 기꺼이 건넸다.”
-구호기관 특성상 투명한 회계 관리가 생명이다. 어떻게 하고 있나.
“사무총장 방에 CCTV가 있다. 금고에 있는 도장 하나 꺼내 찍는 것까지 모든 것이 기록된다. 1원 한푼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 지출에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된다. 홈페이지 ‘도너스 월(donor’s wall)’에 들어가면 기부자 이름을 바로 찾을 수 있다. 구호물품 전달 사항은 생수 한 통, 양말 한 켤레까지 다 공개한다. 실제 입금액을 홈페이지에 일일이 올리고 있다.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모든 조치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전자결제로 이루어져 협회는 현금을 단 한푼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기부자의 의도대로 가장 효율적으로 지원되려면 서로 의논하는 ‘협의’가 중요하다. 기부 자원을 한 번에 털어서 쓰기보다 침착하게 시간을 갖고 대응하는 지원도 필요하다. 소중한 기부금인 만큼 정성스럽게 쓰여야 한다. 그래서 기부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특히 코로나처럼 길어지는 재난은 조금 시간을 갖고 지혜를 모아 꼭 필요한 재난 약자에게 집행되도록 의논하고 있다.”
-그동안 가본 재해 현장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인가.
“지난 4월 강원도 산불 현장에 갔을 때다. 한창 아름답게 피어 있어야 할 벚꽃이 잿빛이 됐더라. 넋이 나간 강아지가 짖고 있었다. 마음이 타들어가는 충격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치유되기까지는 참 오랜 시간이 걸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로 고시원 화재 현장도 기억에 남는다. 고시원 쪽방에서 어렵게 살던, 화재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 트렁크에 짐을 꾸려 지하철로 가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희생자가 7명이나 나왔는데 겨우 1000만원만 모금될 정도로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은 어떻게 구분되나.
“태풍, 호우, 가뭄, 폭염, 대설, 침수, 산사태, 지진은 자연재난이다. 화재, 폭발, 교통사고, 방사능 유출, 통신·수도 등 국가 기반체계 마비로 인한 재난, 코로나 같은 감염병은 사회재난으로 분류된다. 자연재난으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국민 성금은 ‘의연금’이라고 한다. 재해구호법에 따라 희망브리지가 독점적인 분배 권한을 갖는다. 즉 어디로 보냈어도 결국은 희망브리지로 성금이 모여 협회 배분위원이 관련법에 따라 지역별 차등 없이 피해 유형을 고려해 이재민에게 지급한다. 일반 기부금과 달리 재난 피해자 중심의 공평한 배분 방식을 갖고 있다. 이렇게 재난 성금을 일원화해 배분하는 단체는 세계에서도 우리뿐이다. 반면 사회재난은 다르다. ‘기부금’으로 분류되는 성금은 모집 단체가 각자 모금해 각자 배분한다. 기부자가 특정 지역이나 용도를 정할 수 있다. 즉 ‘대구에서 코로나로 피해를 본 자영업자를 위해 써주세요’ 하는 식으로 특정할 수 있다.”
-올해는 장마와 태풍도 이어졌다. 자연재난에는 어떻게 대처했나.
“올해 장마는 장장 54일 동안 전국에 엄청난 비를 쏟아냈다. 이어 태풍 2개가 상륙했다. 희망브리지는 대피시설로 사생활 보호 칸막이와 간이침대 등을 보내고, 수해 현장에 세탁구호 차량도 보냈다. 경북 영덕 강구시장이 기억에 남는다. 흙탕물로 뒤범벅된 옷과 이불 24.5t을 세탁해 뽀송뽀송하게 말려 전달했더니 너무 기뻐하시더라.”
-민간단체로서 재해 지원 관련 정부에 바라는 것은.
“정부는 민간의 지원을 항상 든든하고 귀하게 여겼으면 한다. 관리와 통제가 아닌 협력과 조력의 파트너로 말이다. 민간이기에 더욱더 유연하고 빨리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정부 공무원들이 좀 더 폭이 넓어져야 한다. 어떤 정책을 만들 때 같이 의논하고 그 득실도 국민 입장에서 따져봐야 한다. 민간에 공감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국민이 힘들어진다. 협회는 행정안전부와 협력관계인데 코로나19는 보건복지부와 관련이 크다. 그럴 때도 과감하게 정보를 민간에 공유해주고 민간의 협조를 받았으면 한다. 또 재난 교육은 재난 담당 공무원만이 아니라 직위 상관 없이 모든 공무원이 다 받았으면 한다. 대비가 더 중요하다. 항상 재난만큼은 교육과 준비, 훈련이 필요하다.”
-재난 현장을 겪은 경험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재난이 일상화된 사회가 됐다. 폭염, 집중호우, 지진 그리고 코로나까지. 재난은 우리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다. 평소에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문제라는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재난 대처법을 훈련하고 각 가정에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담은 ‘생존 키트’ 하나 정도는 언제든 들고나갈 수 있게 갖춰야 한다. 그 주체는 국가가 아닌 개인이었으면 좋겠다. 내 생명, 가족, 집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더해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도왔으면 좋겠다.”
프로필
-1963년생. 강원도 화천
-전남여고, 건국대 불문,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한겨레신문 기자
-대통령직속 새천년준비위원회 홍보팀장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비서실장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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