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경계 지휘소입니다. 오늘도 붙잡혀 온 사람이 많습니까.”
전화 통화 소리가 크고 또렷해 조사실 책상에 앉은 나한테도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장은 “아침부터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상대는 “이제부터 체포되는 사람은 무조건 북으로 돌려보내라는 게 본부 지령이다. 수가 너무 많아 처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계장은 잠시 생각한 뒤 “어린애까지 업고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내가 “장연에 간다”고 하자, 부하에게 우리가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걸 직접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정류장에 도착한 우리는 보안서원에게 “꼭 가겠으니 안심하고 돌아가라”고 한 뒤 근처 여관에 방을 잡았다. 저녁 때쯤 해주에 있는 지인 누님 집으로 이동했다. 거기엔 남쪽으로 가려는 이들이 여럿 숨어있었다. 우리는 불과 몇 분 차이로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풀려난 걸 감사히 여겼다.
이튿날 밤, 농사꾼 복장을 한 30대 중반의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골목길을 돌고 돌아 바닷가 근처 집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 집에서 새벽녘에 나와 갈대밭을 거쳐 바닷가에 도착했다. 작은 나룻배가 보였다. 남쪽으로 가는 배였다. 아내와 어린 것을 태운 뒤 나도 타려는데 배가 만원이라 탈 수 없다고 했다. 사공을 포함해 6명쯤 태울 수 있는 작은 어선이었다. 10여분 뒤 다른 배를 타고 바다를 보니 탈북자를 나르는 쪽배가 사방에 있었다. 경비정들이 이 배들을 잡으려 어두운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온몸이 땀에 젖은 사공이 “경비정에 잡히면 수영할 수 있는 사람은 바다로 뛰어들라”고 했다.
큰 배 옆을 돌아가고 몸을 숨기기도 하면서 200m쯤 갔을까. 사공은 “이제 안심하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배 안 사람들이 서로 인사했다. 다른 배에선 “대한민국 만세” “자유 만세”를 외쳤다. 우리도 호응해 같이 만세를 불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남쪽 바닷가에 도착하자 사공이 간곡하게 당부했다. “우리가 공산주의 치하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도록 선생님들이 힘써 주십시오. 우리는 한 명이라도 더 남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우리를 조국의 반역자로 모는 보안서원과는 전혀 달랐다.
바닷가에는 서북청년들이 장작불을 피워놓고 탈북자를 환영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에게 아내와 아들을 수소문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참이 지난 뒤 그가 나를 아내와 아들이 있는 불가로 안내했다. 우리는 별 큰일이 아니었다는 듯이 불을 함께 쬐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바다 위에선 서로의 안전을 위해 그토록 간절히 기도를 드렸는데도 말이다. 철없는 아기 울음소리가 경비정을 유인할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옥의 문을 헤치고 나오는 것과 같은 모험을 감행했다. 주님의 이끄심과 보호를 믿으면서 말이다. 모험에 성공한 그 날은 1947년 8월 18일 새벽이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