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예배에 대해 말이 많던 때가 있었을까. 코로나19 사태로 ‘비대면 예배가 옳다’ 혹은 ‘대면 예배가 옳다’를 두고 논쟁에 분열까지 일어난다.
성경에 나온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레위기 9장과 10장에 대조돼 나타난다. 9장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나오지만, 10장에는 실패한 예배가 나온다.
아론이 드린 예배는 불이 임했고 하나님이 받으셨다. 백성들이 복을 받았다. 아론이 드린 예배의 특징은 무엇인가. 예배 때 불이 임했다는 것이다. 열왕기상 18장 24절을 보면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고 엘리야가 말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에는 불이 있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복음을 확산시킨 복음의 중심에도 불이 있었다.
그 불은 아브라함의 예배에 처음 나온다. 창세기 15장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예배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위대한 약속과 함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신다.
그다음 모세와 아론이 예배드린 후 축복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레 9:24)
그 후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 아합왕 시절 이스라엘이 타락해 모든 사람이 바알을 섬길 때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예배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왕상 18:38)
신약에 와서는 그 불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다. 그 불은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타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수없이 질문하고 있다. 그 답은 성도가 성령으로 세례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걸 수없이 봤기 때문이다. 성령 체험이 없으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과 지식에 따라 산다.
순복음삼마교회는 레위기 훈련에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강조한다. 진정한 예배에 성령의 불이 있음을 훈련하고 그 불을 사모하고 받게 한다.(마 3:11)
레위기에서 불은 어떻게 내렸을까. 첫째, 속죄제를 온전히 드릴 때 내렸다. 속죄제란 주님의 보혈을 철저히 의지하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제단에는 온통 보혈이 가득했다.(레 9:9) 그래서 성도들은 보혈 찬송으로 무장하고 기도할 때 철저히 보혈을 의지한다. 설교도 주님의 보혈로 덮을 수 있도록 준비한다.
둘째, 번제를 온전히 드릴 때 내렸다. 번제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한다. 헌신은 흠 없는 것을 드리는 것이다. 온전한 번제를 위해선 생각을 바꾸고 위선을 벗고 세상 가치를 성령의 불로 태워야 한다. 회개해 심령을 청결하게 하고 내장과 정강이를 깨끗하게 씻어 태운다. 이는 목회자가 할 일이다. 목회자는 물질부터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한다. 우리 마음을 모두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래야 성령의 불이 임한다.
셋째, 화목제를 드릴 때 내렸다. 화목제는 히브리어로 셔라밈이다. 이는 ‘평화가 완전히 복원됐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관계, 이웃과 관계, 차별의 관계가 모두 회복됨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끝나면 피를 갖고 회막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다. 제사장이 손을 들어 축복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
성경은 성령의 불이 임할 때 백성들이 순종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아브라함과 다윗, 솔로몬, 갈멜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늘에서 불이 임하자 엎드렸다. 이것이 참된 예배요, 살아있는 교회다.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는 뭘까. 대표적인 게 나답과 아비후의 예배다.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를 드릴 때도 불이 임했다. 그런데 그 불은 죽음의 불이었다.
불은 두 종류다. 성령의 불은 우리의 죄악을 태우고 새로운 능력을 주시는 것이지만 심판의 불은 지옥에서 나는 불이다. 나답과 아비후는 어떤 예배를 드렸기에 심판의 불이 임했을까. 이유는 3가지였다.
그들은 각기 다른 그릇을 갖고 들어갔다. 원래 성소에 들어갈 때는 모세가 만든 금 향로를갖고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이 가진 그릇을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다. 요즘 말로 하면 설교 도구로 인문학 철학 심리학을 사용한 것이다. 다른 불을 갖고 갔다. 다른 불은 뭘까. 인간의 열심 혹은 사람의 감성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독주를 마신 것도 문제다.(레 10:9) 여기에서 독주는 목회자가 세속화된 것을 의미한다.(계 17:1~4)
주의 종이 세속화되면 불이 내리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불을 받지 못하고 자기 좋을 대로 행한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며 방자하게 산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 가장 위험한 것을 목회자의 세속화라고 경고한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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