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추운 겨울날 당신과 나의 안녕을 묻는다

입력 2020-12-24 19:31 수정 2021-11-04 17:01
만화 ‘안녕 커뮤니티’에 나오는 문안동 노인들의 우려는 현실이다. 사진관을 운영하던 박씨의 고독한 죽음은 노인들이 매일 아침 서로의 안부를 묻는 원을 그리는 컴퍼스 역할을 한다. 고독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된 매일의 문안(問安)은 마찰열을 발생시키듯 커뮤니티 내 삶의 온도도 조금 올린다. 게티이미지뱅크

비밀에는 무게가 없다. 다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느끼는 건 무거운 비밀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사라짐이란 기실 상상 속에서만 유효한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다행히 망각이 사라짐의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데, 인간에게 과거의 기억을 잊음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힘의 대부분은 망각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그런데 망각하는 데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망각에 의한 사라짐도 아닌 이 가벼움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비밀을 털어놓으면 왜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느낄까.

비밀은 ‘혼자’라는 이름의 지옥이다. 그것은 나만 알고 있기에 가치 있는 이야기지만 나만 알고 있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가벼워진다고 느끼는 건 한 사람 안에 밀폐되어 있던 이야기에 뚜껑이 열리며 다른 사람에게, 때로 여러 사람에게 두루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비밀의 내용은 사라지지 않지만 여러 사람에게 공유된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사라진 것도 아니고 가벼워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혼자에서 함께로 늘어난 것이다.

나쁜 사람들 중에는 비밀의 속성인 ‘혼자’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폭력이 영원히 한 사람 안에 밀봉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러니까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비밀을 꺼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사회가 피해자로 하여금 비밀을 꺼내 놓을 만큼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구정인 만화 ‘비밀을 말할 시간’은 그 철 지난 생각, 그러나 온전히 부정할 수 없는 생각에 균열을 낸다. 성폭력과의 싸움은 ‘강요된 비밀’과의 싸움이며 강요된 ‘혼자’와의 싸움이다.

‘혼자’를 키워드로 한 콘텐츠가 일군의 장르를 형성할 정도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1인 가구가 새로운, 그러면서도 보편적인 단위이자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증가하는 작품들 가운데에는 김정연의 ‘혼자를 기르는 법’처럼 1인 가구의 생활양식에 초점을 맞추는 부류도 있고 김완 에세이 ‘죽은 자의 집 청소’처럼 1인 가구에 드리운 그늘을 조명하는 부류도 있다. 요즘은 후자에 더 방점을 찍은 작품이 많은 것 같다.

혼자 산다고 해서 외롭고 고립된 죽음 맞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외롭고 고독한 죽음을 맞는다고 해서 그가 꼭 혼자 살았던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혼자 죽어 가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외로움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생의 본질임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죽는 순간만큼은 외롭고 싶지 않은 모순에 빠진다. 다드래기의 만화 ‘안녕 커뮤니티’는 혼자 맞는 죽음에 대한 걱정과 공포를 소재로 삼지만 물리적 상태로서의 혼자보다는 서서히 고립되어 가며 경험하는 존재론적 상태로서의 혼자에 더 집중한다. 1인 가구의 고독사보다 모두의 고독사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새벽 6시 30분 방덕수 씨의 첫 보고가 시작된다. “안녕하제?” 인사를 건네받는 건 두 번째 순번 설쌍연 씨다. “7월 1일 쓸쌍여이~ 6시 반 일났소오~” 설쌍연 씨가 남편 조영순 씨의 안부를 확인한 뒤 조영순 씨는 장형팔 씨에게 전화한다. 장형팔 씨는 요즘 같은 아파트에 사는 큰아들 집으로 출근해 손주들 아침밥 챙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한 장형팔 씨는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중인 김밥집 사장 신세봉 씨에게 연락하고, 신세봉 씨와 통화한 김춘복 씨는 내심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정분례 씨에게 전화를 건다. “밤새 안녕하셨어요!” 돌고 돌아 1번 방덕수 씨까지 전화를 받으면 생존 확인이 모두 완료된다. 강제로 건강 상태를 보고하는 이들은 문안동 안녕 커뮤니티. 매일 아침 정해진 순서대로 연락하며 서로의 안녕을 체크하는 고독사 방지 모임이다.

‘안녕 커뮤니티’ 사람들은 안부 전화를 하며 하나의 큰 원을 그린다. 그 사이사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 문제, 재개발을 둘러싼 주민들의 대립, 가부장제를 둘러싼 다툼, 다문화가정과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이 튀어나온다. 삶의 문제들이 이들을 선 밖으로 이탈시킬 때마다 원은 위태로진다. 그러나 죽음을 바통 삼은 안부 달리기는 계속된다.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선을 그리며 이어 달리게 만드는 건 죽음을 예비한 고독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외로운 인간들이 간밤의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죽음의 그림자에도 빛이 조금 스며든다. 삶의 온도가 조금 올라간다. 이 추운 겨울, 문안동 노인들이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는 소리를 들으며 뒤늦게, 그러나 아주 늦은 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도 내 이웃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밤새 안녕하셨죠?

박혜진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