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더블’은 눈 감고 보는 체험형 온라인 공연이다. 20분 동안 오로지 ‘소리’ 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독특한 작품이다. 실제 무대에서 펼쳐진 공연의 영상을 고스란히 옮기는 데 그쳤던 팬데믹 초반의 온라인 공연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막이 오르면 청중은 안내 음성에 맞춰 가상 식탁에 자리 잡고 의문의 남자와 만난다. 남자의 끈적한 숨소리와 강박적 행동, 알 수 없는 소음이 뒤엉킨 이 공간은 청중의 상상 속에 펼쳐져 잊지 못할 섬뜩함을 안긴다.
우란문화재단이 28일까지 국내 초연하는 ‘더블’은 지인이 다른 사람이 됐다고 믿는 정신질환 카그라 증후군이 소재다. 360도 입체음향 기술을 활용한 프로젝트를 시도해온 영국 이머시브 오디오 씨어터 다크필드가 지난 7월 호주에서 세계 초연한 작품으로 청중은 별도 해설 없이도 무대 위 주인공의 움직임과 소리의 위치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재단 관계자는 “온라인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7월부터 다크필드와 한국어 버전으로 다듬는 협업을 진행했다”며 “일반 이어폰으로도 방향·거리를 인지할 만큼 밀도 높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내년 1월 31일까지 해븐마니아가 공개하는 뮤지컬 ‘에스텔라 스크루지’도 온라인 스트리밍을 겨냥해 제작됐다. 세계적인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로 유명한 존 캐어드 연출가와 폴 고든 음악감독 신작으로, 스크루지 영감을 CEO로 각색한 작품이다. 온라인 환경을 활용해 애니메이션과 배우의 연기를 버무린 영상이 백미다. 한글 자막은 제공되지 않으나 공연기획사 달컴퍼니 홈페이지에서 줄거리와 노래 리스트를 참고할 수 있다.
다양한 이색 공연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창작 방식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코로나19로 콘텐츠 유통의 플랫폼이 극장에서 온라인 무대로 바뀌면서 실험적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열린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화제를 모은 ‘보더라인’이 대표적이다. 이경성 연출가가 이끄는 한국 창작집단 바키(VaQi)와 독일 레지덴츠 테아터가 공동 제작한 ‘보더라인’은 1만㎞ 떨어진 양국 배우의 연기를 한 촬영으로 묶은 작품으로 28~31일 또다른 공동제작자 프로듀서 그룹 도트의 유튜브 채널에서 재상영회를 가진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도 이달 ‘공연예술 온라인 창작모형 실험’이라는 타이틀 아래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을 이용한 ‘나의 Non-고기 분투기’(12일)와 혼합현실(MR) 플랫폼 스페이셜을 활용한 ‘애리 인 어더랜드’(19일)를 선보였었다.
공연 내용도 여러 갈래로 분화하고 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스테디셀러 뮤지컬 ‘몬테크리스토’는 25~26일 네이버TV 후원 라이브에서 드레스리허설을 유료 공개한다. 드레스리허설은 개막 직전 실제 공연처럼 진행되는 최종 연습이다. 온라인이 활기를 띠기 전 드레스리허설은 대개 언론 홍보 등의 목적으로만 활용되곤 했다. 이례적인 이번 리허설 공개는 공연이 중단돼 생계 위협을 맞닥뜨린 배우와 제작진을 돕기 위해 마련됐다.
‘수고했어, 오늘도’ 등 여러 히트곡을 낸 그룹 옥상달빛은 국내 처음으로 언택트(비대면) 군 위문 공연을 진행한다. 27일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전파를 타는 콘서트는 옥상달빛이 연말마다 개최하던 ‘수고했어, 올해도’를 새롭게 재구성한 공연으로 수도방위사령부와 국군간호사관학교 군인이 관객이다. 실시간 대화가 가능한 온라인 특성에 맞춰 소통을 강화했다. 옥상달빛은 아름다운 노래와 더불어 군인들과 해당 부대에 사연을 전하고 싶은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받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온라인 공연도 준비됐다. 서울문화재단은 남산예술센터 올해 공연 프로그램의 배리어 프리 영상을 상영하는 ‘장벽 없는 온라인 극장’을 30일까지 재단 유튜브 채널과 네이버TV에서 무료로 선보인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해설과 수어 통역, 시각장애인을 위한 소리 해설이 담긴 영상들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관람할 수 있다. 24일 한국 사회의 아픔을 파고든 ‘아카시아와, 아카시아를 삼키는 것’, 27~28일 진실을 향한 복수의 여정을 담은 ‘왕서개 이야기’, 29~30일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극화한 ‘휴먼 푸가’ 등이 차례차례 공개된다.
송년 모임도 어려운 올해 연말을 뜻깊게 마무리할 공연들도 포진해 있다. 31일 온라인 타종행사가 시작되기 전 시민들을 위해 ‘서울시향과 함께 하는 미라클 서울’이 서울시향·서울시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된다. 선열의 역사가 담긴 서대문형무소 이야기와 클래식이 어우러진 공연이다. 서울돈화문국악당은 민요 록밴드 씽씽 보컬 출신 추다혜를 중심으로 뭉친 추다혜차지스와 전통음악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온 악단광칠의 ‘송년 콘서트’를 각각 28일과 30일 유튜브에서 선보인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