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치안정책 윤활유役…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 ‘올인’

입력 2020-12-26 04:03
취임 1년을 맞은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이 지난 22일 서울 미근동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성학자이기도 한 조 기획관은 “스스로 피해자임을 인식조차 못하는 어린 피해자들이 많다”며 “이들이 마음 놓고 피해사실을 신고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최현규 기자

경찰은 지난해 5월 여성안전기획관이라는 새로운 직제를 마련했다.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을 비롯해 여성 혐오범죄가 이어지고, SNS를 통해 ‘미투운동’이 전개되면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총력 대응할 필요성이 대두되던 때다. 당시 경찰 수장이었던 민갑룡 전 경찰청장이 내걸었던 제1호 치안정책이 ‘여성 대상 범죄 근절’이었다.

지난해 12월 조주은(53)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이 임명됐다. 그는 경찰청 지휘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여성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국회에서 여성·가족 관련 법안들을 조사하는 입법조사관으로 일했다. ‘현대가족 이야기’ ‘기획된 가족’ 등 다수의 저작 역시 그가 여성의 권리와 지위 향상에 천착해 왔다는 점을 보여준다.

조 기획관은 지난 22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사무실에서 가진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가진 여성학자가 보수적 이미지가 강한 경찰 조직에 들어오게 된 건데,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됐던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여성학자와 경찰조직이라는 ‘어색한 만남’은 지난 24일로 1년이 됐다. 그는 “정작 어색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고 1년을 돌아봤다. 여성학자로서 그의 이력은 여성 안전과 관련한 여성계의 여러 목소리들이 경찰의 구체적인 치안정책으로 구현되는 데 윤활유 역할을 했다.

조 기획관의 지난 1년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보호·지원 업무로 채워졌다. 지난 3월 국민일보와 ‘추적단 불꽃’의 보도로 ‘n번방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서 경찰은 디지털성범죄 특별수사단을 꾸려 수사에 나섰고, 조 기획관은 피해자 지원을 총괄 지휘했다. 지난 17일 기준 경찰이 확인한 피해자는 1065명에 달한다. 1011명은 피해자의 신원을 특정해 조사가 이뤄졌고, 54명의 신원은 계속 확인하는 중이다.

조 기획관은 피해자 지원업무를 하다보니 기존 오프라인 성범죄와는 다른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의 특성이 엿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프라인 성범죄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쉽게 특정이 된다. 하지만 디지털성범죄는 자신이 피해자인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숱하다”고 했다. 일선 경찰관들이 어려움을 겪는 지점이기도 하다. 조 기획관은 “성착취 영상이 피의자의 휴대전화에서 나왔다든지 하는 피해사실을 피해자에게 알려줘야 하는 게 경찰의 당연한 임무인데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갈 수 있었던 피해자에게 나쁜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다는 점이 늘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또 다른 특징은 피해자 대부분이 어리다는 점이다. 특정된 피해자 1011명 중 10대가 615명으로 절반을 훌쩍 넘는다. 조 기획관은 “판단력이 성숙하지 않은 10대 피해자들은 일종의 ‘공범의식’을 가진 경우가 있다. 가해자들의 그루밍(성범죄 전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행위)에 엮인 피해자들이 ‘애초에 내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닌가’ 자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10대 피해자들은 피해사실을 더 숨기게 되고, 가해자는 활보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조 기획관은 “적극적으로 피해자들이 신고에 나서도록 해야 하는데 이는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사회인식 변화, 청소년 성교육 강화 등 전 사회가 나서야 하는 문제”라며 “위장수사를 예외적으로 허용해 더 적극적인 수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입법적 개선 노력도 수반돼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경찰의 피해지원 안내에 대한 피해자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현재 경찰은 디지털성범죄의 경우 9가지 피해자 지원책을 마련해 두고 있다. 동성경찰 조사·입회, 신변보호 요청, 국선변호사 선임 요청, 가명조서 작성, 신뢰관계자 동석, 진술녹화, 진술조력인 참여, 영상삭제 지원·연계, 해바라기센터·상담소 연계가 그것이다. 피해자 입장에서 대부분 지원을 요청할 것 같지만, 아니라고 한다. 1000명이 넘는 피해자 중 신변 보호를 요청한 사람은 174명에 그쳤고, 영상삭제 지원·연계를 요청한 피해자는 절반(459명) 수준이었다.


조 기획관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의 피해유형과 정도, 개인적 특성 등과 맞물려 피해자가 요구하는 지원책은 매우 다양하다”며 “경찰이 놓치고 있는 피해자 보호·지원 공백은 없는지, 2차 피해는 발생하지 않는지 섬세하게 살펴보고 피해자 보호·지원체계를 더 촘촘히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성학 전공자로서 국회 입법조사관으로 일하면서 구축한 여성단체 활동가 등과의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있다. 성범죄 피해자 보호·지원을 비롯한 여성 치안정책 제안들을 현장에서 구현해 내겠다는 게 그의 목표이기도 하다.

조 기획관이 내년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려는 정책은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경찰의 선제적 개입이다. 선제적·예방적 경찰 활동은 김창룡 경찰청장이 취임 때부터 최우선순위로 강조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조 기획관은 “스토킹 범죄를 예로 들면 범죄가 발생한 이후에 경찰이 피해자 보호에 들어가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라며 “범죄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스토킹 범죄의 징후가 있는 경우에는 경찰이 초반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현재 스토킹 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는 사람에게 경찰이 판사의 승인을 받아 접근금지 등 피해자 보호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스토킹처벌법 정부 제정안이 입법예고를 마치고 국무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다.

범죄 발생이 우려되는 장소를 예측하는 ‘범죄위험도 예측 분석시스템(PRE-CAS)’을 여성 대상 범죄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조 기획관은 “시스템을 통해 성범죄 등의 발생위험장소를 예측해 방범시설을 확충하고, 지역안전순찰·탄력순찰을 강화해 여성 대상 범죄를 사전 차단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