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 이런 성탄절을 맞아본 적이 있었는가.
교회에 대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방침이 너무 기계적이고 도식적·획일적이란 생각이 들어 성도들의 예배 참석 문제를 공간 대비 비율로 풀어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최근엔 문화체육관광부, 방역기관과 협의·조정을 위해 뛰고 또 뛰었다. 특히 성탄절엔 공간 대비를 넘어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예배를 배려해 주도록 설득에 나섰다. 방역 기관으로부터 어느 정도 유연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그 즈음 확진자가 1000명대로 올라섰고 교회발 집단감염까지 터져버렸다. 맥이 풀리고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기나긴 터널을 지나가야 하는가. 어느 유명한 여론조사 기관 대표가 한 말이 생각났다. “목사님, 한국교회는 당분간 ‘셧다운’ ‘록다운’을 더 겪어야 할 듯합니다. 아직 한국교회는 본질로 회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최근 한기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총회장님, 왜 이렇게 우리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교회발 확진이 더 많이 터지는 것입니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국교회가 아직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가 인간을 숙주로 삼은 것은 탐욕 때문이지 않습니까. 한국교회가 욕망을 내려놓고 진정한 생명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집회나 예배가 신앙을 빙자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돼선 안 됩니다. 교회는 탐욕을 버리고 진정한 신앙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 자신을 돌아봤다. “나 역시 코로나 사태 중 단 한 번도 현장예배를 포기한 적이 없는데, 혹시 ‘바리새적 사고’ ‘중세적 사고’로 현장예배를 지키려 한 적은 없었는가. 정말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갈망하고 영적인 굶주림으로 예배를 사모하도록 했던가. 아니면 중세의 사제들이 공간적 권위와 교세적 위세를 위해 신자들을 강제로 끌어모았던 것처럼 나의 마음 한편에도 그런 이끼가 끼지 않았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앙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목회를 해온 교회는 아무리 큰 교회라도 집단감염이 없었다. 사회적 보건규칙과 상식을 무시하고 비상식적·비이성적 집회를 하는 교회에서만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무엇 때문에 사회 여론을 무시하고 비정상적 집회를 연속으로 하다 집단감염을 일으켰단 말인가. 이로 인해 한국교회에 얼마나 큰 손상을 입히고 국민들의 분노를 사게 했는가.
2000년 전 아기 예수는 가장 낮고 천한 말구유로 오셨다. 그는 교권이나 권위엔 관심도 갖지 않았다. 군중이 열광하며 임금으로 삼으려 할 때 오히려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홀로 말씀을 묵상하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주력하지 않았던가.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성탄절을 앞두고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의 상황은 어쩌면 아기 예수가 우리에게 주시는 시그널일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비워야 주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 얼마나 낮아져야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얼마나 가슴 저려야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
한 총회장의 말씀처럼 한국교회는 탐욕을 버려야 한다. 맨살의 아기 예수가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 땅에 다시 오시도록 해야겠는가. 우리가 교회와 신앙의 본질을 느끼고 깨닫는다면 더 가슴을 비워야 한다. 더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더 가슴 저려야 한다. 어쩌면 그럴 즈음에야 하나님께서 코로나도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으실까.
올해 성탄절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이끼부터 씻어보자. 더 비워보자. 더 내려가 보자. 하늘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사랑에 더 가슴 저려보자.
새에덴교회 예장합동 총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