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석 (9) 공산화 물결 피해 탈북… 검문 걸려 조사실 끌려가

입력 2020-12-25 03:02
1945년 8월 26일 소련의 붉은 군대가 평양에 입성하고 있다. 김형석 교수는 공산정권의 박해를 피해 47년 8월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왔다. 국민일보DB

8·15 해방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다닌 국민학교 건물을 증축하고 농촌 청소년을 위한 중학교를 재건한 것이었다. 낮에는 정규 중학과정을 가르치고 밤에는 인근 농촌의 청년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었다. 내 꿈은 고향 주변에 중등 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이가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교장을 맡았다. 학교는 공산사회에 참여하기 힘든 여러 친구의 피신처도 됐다.

하지만 공산정권이 빠르게 정착하면서 학교 역시 공산화의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친구인 설립자 김현석 장로는 조선민주당 간부라는 이유로 보안서원에 체포됐다. 김 장로는 윗마을에 살고 나는 아랫마을에 살았는데, 그를 실은 트럭이 아랫마을로 오는 게 보였다. 그때 급히 뛰어온 작은동생이 “형도 잡아갈 거 같으니 뒷산으로 가라”고 외쳤다. 다음 차례는 내가 분명했다. 뒷산에서 내려온 뒤 38선을 넘어 서울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38선을 넘기로 작정했으나 누구에게도 속내를 밝힐 순 없었다. 후임자 문제 등을 정리한 뒤 아내에게 계획을 밝히고 무사 탈출을 위해 같이 기도했다. 얼마 뒤 부모님께도 알렸다. 고향을 등질 날은 1947년 8월 16일로 정했다. 광복 2주년을 전후해 경계가 느슨해질 거라고 판단했다.

지금도 그날 아침을 잊지 못한다. 아내는 8개월 된 큰아들을 업었고, 나는 평소처럼 보이려고 빈손으로 뒤를 따랐다. 세 살배기 큰딸은 할머니가 맡았다가 기회가 닿는 대로 서울에 보내주기로 했다. 딸은 우리가 평양에서 선물을 사 올 걸 기대하며 싱글벙글했다. 아버지는 떠나는 장손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아내의 발걸음을 멈췄다. 슬프게도 이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38선을 넘는 데 실패했다.

우리는 평양과 사리원을 거쳐 해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승강구 근처 구석에 앉았는데 하필 맞은편 사람들이 보안서원이었다. 열차에서 38선을 넘어 남하하려는 사람을 잡는 게 이들의 임무였다. 열차 밖 장수산 일대 경관은 참 수려했지만,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우리는 짐짓 “장연에서 친척을 만난 뒤 장수산 부근의 인척을 만나자”는 대화를 하며 보안서원의 주의를 돌렸다. 열차 내에서 여러 사람이 잡혀갔으나 우리는 무사히 해주역에 도착했다.

아내가 나보다 50m 정도 앞서 걸으며 여관을 찾는데 파출소 앞을 지나가다 검문을 받았다. 탈북 의도를 직감한 보안서원이 멈춰 세운 것이다. 결국 우리는 탈북하다 붙잡힌 사람들이 수용된 국민학교 건물로 끌려갔다. 앞채엔 남자가, 뒤채에는 여자가 수용됐다.

내가 먼저 조사실에 들어가고, 어린것을 업은 아내는 일단 현관에서 대기했다. 계장급의 책임자가 나를 조사하기 위해 서류를 들고 말문을 열려던 참에, 갑자기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주변에 전화 받을 사람이 없자 책임자가 직접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