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산타는 1월 9일에 온다고 합니다. 25일 새벽 도착 후 2주 자가 격리.’ 요즘 온라인 상에 회자되고 있는 우스갯소리입니다. 말 그대로 우스갯소리이긴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 아니라 이미 산타가 된 지 오래인 것 같아 쓴웃음을 짓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 가운데 인간의 몸을 입고 구원의 주로 오신 성탄의 진정한 의미에 세상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에게 이 성탄은 소비하는 문화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성탄은 단순한 ‘문화’를 넘어 더 깊은 영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구약의 성전 제사를 통해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완전한 ‘성전’으로(요 2:19) 이 땅 가운데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은 이것을 ‘영원한 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의 역할은 제사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의 핵심은 희생을 통해 거룩을 회복하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희생으로 생명을 얻게 된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 제사는 단번에 끝났지만 그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우리는, 또 다른 ‘성전’으로 살아가면서 우리 삶을 통해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는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도록 하나님의 동역자가 돼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자인 가브리엘이 요셉의 꿈에 예수님이 태어날 것을 계시하는 장면입니다. 19절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마리아의 임신은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에게 마리아를 데려오고,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당시 율법과 유대 관습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여인을 버리거나 심지어 돌로 치는 것은 남편의 권리였고, 아이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은 남편과 아버지의 권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마리아도 순결한 처녀로서 자신이 받아야 할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합니다. 결국 요셉과 마리아 모두 하나님의 ‘희생의 동역자’가 됩니다.
‘희생’은 ‘영원한 생명’을 맺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에 동일한 도전을 던집니다. 교회인 우리의 삶을 통해 내 생각과 방법을 내려놓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희생의 고백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게 하십니다. 또 네 이웃과 세상을 위해 더 낮아지고, 더 희생하고 더 섬기라 도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을 보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희생은 생명을 낳습니다. 특별히 지난 한 해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지나오면서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강력한 세상의 도전을 직면했습니다. 2020년 복된 성탄을 맞아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이 희생의 삶, 희생의 예배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온 세상 속으로 흘려보내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회복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성재 목사(위례 예배인교회)
◇위례 예배인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의 젊은 교회입나다. 예배 사역과 예술, 문화 사역에 특화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