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그가 Shift+Del을 누른 이유

입력 2020-12-23 04:05

‘4234.BAK’

감사원이 산업통상자원부 컴퓨터를 디지털 포렌식 하자 이런 이름의 파일이 나왔다. 감사원은 월성 원전 1호기 조기폐쇄 결정 관련 업무를 한 산업부 공무원 A의 컴퓨터를 복구했다. 뜻을 짐작키 어려운 제목이 나오자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A는 이렇게 답했다. “‘파일 작성일자_한수원 사장에게 요청할 사항’으로 돼 있던 파일명을 4234로 수정하여 삭제했습니다. 복구됐을 때 어떤 문서인지 확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감사원 감사보고서에 나오는 진술이다.

보고서를 보면 2019년 12월 1일 밤의 A는 치밀하면서도 허둥댔다. 감사관 면담 하루 전이자 일요일이던 그날 A는 오후 10시가 넘어 사무실로 들어갔다. 과거 자신이 썼지만 지금은 다른 직원이 쓰는 컴퓨터를 켜고 월성 1호기와 관련한 파일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파일명과 파일 내용을 모두 수정하고 저장한 뒤 삭제했다. 복구돼도 내용을 알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방법이 시간이 오래 걸리자 제목은 그대로 두고 내용만 수정한 뒤 파일을 삭제했다. 그래도 삭제할 자료가 많이 남아 있자 이번에는 Shift와 Delete를 동시에 눌러 파일을 삭제했다. 이렇게 하면 파일이 ‘완전히’ 삭제돼 휴지통에 남지 않게 된다. 이 방법도 시간이 걸리자 나중에는 폴더를 통째로 삭제했다. 이런 식으로 122개 폴더 444개 문서를 삭제했다. A가 황급히 문서를 지운 이유는 월성 1호기 조기폐쇄 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스스로 알아서였을 것이다. 이에 관한 감사원의 평가는 ‘절차적 합리성과 정당성의 결여’다. 산업부는 외부기관의 경제성 평가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월성 1호기 폐쇄 시기에 대한 방침을 결정했다. ‘조기폐쇄 결정과 동시에 가동중단’하겠다는 것이었다. 경제성 평가를 맡은 회계법인은 산업부와 회의 뒤 원전 이용률과 판매단가 예측치를 계속 가동 시 경제성이 낮게 나오는 방향으로 수정했다. 계속 가동의 경제적 이익 전망이 3427억원에서 224억원으로 낮아졌다.

감사원은 정부에 원전 폐쇄의 경제성 평가 제도를 정비하라고 주문했다. 그렇지만 월성 1호기 조기폐쇄 결정에 이르기까지 절차적 합리성이 왜 지켜지지 않았는지는 좀 더 상세한 규명이 필요하다. 어떤 힘이 공무원 A로 하여금 한밤중에 Shift+Delete를 연속으로 누르게 했는지 밝혀진 게 많지 않다. 더불어민주당은 현재 대전지검이 수행 중인 관련 수사에 대해 ‘개혁 대상인 검찰이 국정과제까지 수사하고 있다’는 프레임으로 대응하고 있다. 속이 뻔히 보이는 논점 흐리기다. 검찰의 월성 1호기 관련 수사는 ‘절차’에 관한 것이다. 현 정권에서는 목표를 위해 절차를 무력화하는 모습이 잇따라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가 뜻대로 되지 않자 야당의 비토권을 다수의 힘으로 없애버렸다. 스스로 만든 당헌이 서울·부산시장 재보궐 선거에 걸림돌이 되자 아예 당헌을 바꿨다. 민주주의에서 절차가 중요한 이유는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함이다. 대통령의 공약이나 국정과제라고 해서 절차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독재가 된다. 대통령이 검찰총장에게 “살아있는 권력도 수사하라”고 한 것은 절차를 어기는 권력을 감시해 달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월성 1호기 수사야말로 그 당부에 딱 들어맞는 수사다. 일각에서 공수처가 해당 수사를 가져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 검찰이 수사해야 한다. 검찰은 월성 1호기의 조기폐쇄 결정 과정에서 절차가 어떻게 지켜지지 않았는지 진상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권기석 이슈&탐사2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