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 때 달리기를 하면 들어온 순서대로 팔뚝에 도장을 찍어줬다. 그 도장을 무척이나 받고 싶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찍힌 적 없다. 꼴찌나 벗어나면 다행이었다. 시험이나 글짓기는 노력하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을 수 있었지만 달리기는 그러한 영역이 아니라 생각하고 지레 포기했다. 상품으로 주어지는 크레파스나 스케치북 같은 것은 받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도장만 한번 내 팔뚝에 찍어줬으면 좋겠다고 찔끔 눈물을 훔쳤다. 운동회를 마치고 돌아갈 때 친구들은 팔뚝에 남아있는 도장의 흔적을 자랑스레 흔들어 보이는데, 샘이 나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내가 올해 2000㎞를 달렸다. 편의점 일에 글까지 쓰고, 게다가 코로나19 영향으로 여러모로 어수선한 와중에도 매일 10㎞씩 꼬박 200번을 뛰었다. 그리고 가을에는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했다. 외로이 홀로 뛰는 언택트 대회인 데다 첫 마라톤치고는 기록도 썩 나쁘지 않다. 만년 꼴찌 봉달호가 이렇게 달리기에 심취한 모습을 어린 날의 봉달호가 본다면 깜짝 놀라지 않을까. 내가 이만큼 달릴 수 있다니!
가끔은 타임머신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래서 중년의 내가 어린 나를 찾아가 응원해주고, 어린 날의 내가 늘그막의 내게 다가가 어깨를 주물러주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렇게 타임머신이 존재한대도 2020년으로 되돌아가는 일만은 사양하겠다”고 사람들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는데, 미래의 어느 순간에 타임머신을 탄다면 나는 2020년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그것은 솔로몬의 시대보다 출애굽의 연대와 함께하고픈 마음이랄까. 이렇게 살아왔구나, 이렇게 버텨냈구나 하면서 흐뭇하게 바라볼 것 같다.
꽃중년이 되어가며 호르몬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인지,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또르르 눈물이 흐르는 경우가 잦다. 심지어 예능이나 다큐를 보면서도 운다. 엊그제는 편의점이 한가한 시간에 휴대전화로 ‘복면가왕’이란 프로를 봤는데, 고양이 가면을 쓴 참가자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펑펑 울었다. “맘껏 울 수도 또 맘껏 웃을 수도 없는 지친 하루의 끝…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그댄 나의 자랑이죠.” 처음 듣는 노래인데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와 머물며 지친 마음을 응원했다. 수고 많았구나, 봉달호!
지독히 힘든 한 해였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일만 가득한 한 해였다. 힘들지 않은 사람을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그런 한 해였다. 그래도 뒤돌아 톺아보면 나 자신을 이렇게 위로해주고 싶다.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솔직히 내 한 몸 건사하기 어려운 요즘이지만,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지쳐 포기한 사람들에게도 감히 용기를 전하고 싶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일등에게도 꼴찌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팔뚝에 도장을 찍어줘야 하는 2020년 아닐까 싶다. “참 잘했어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떠날 것 같지 않던 한 해에 드디어 작별 인사를! 아듀, 2020!
봉달호 (작가·편의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