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1923)에 나오는 이 구절은 100년 후에나 있을 거리두기를 콕 집어 예견한 듯하다.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는 말라.”
거리두기는 방역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건전한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위 구절은 원래 신혼부부를 위해 주어진 지침이다. 결혼은 한 몸이 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개별성을 잃고 한 사람에게 흡수되는 건 아니다. 남편과 아내는 자기 몸을 제 것이라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헌신하지만, 각각 은밀한 기도의 골방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구절은 우리 사회에도 적용된다. 건전한 사회가 되기 위해선 독립된 실존적 개인과 공동체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양극단으로 나아가선 안 된다. 우리는 코로나19 시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서구사회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방역 지침에 항의하며 사재기와 약탈이 성행하고 광란의 파티가 벌어지는 극단적 개인주의를 목격했다. 자유와 동반되는 허무를 감당할 수 없는 개인은 아주 쉽게 인종주의나 애국주의와 같은 집단주의로 도피한다. 소위 ‘트럼피즘’의 원재료다.
거리두기는 교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정부 지침에 따라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예배 형태와 본질에 대해 질문할 기회를 얻었다. ‘대면 예배’라. 예배드릴 때 누구와 대면하는가. 하나님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와의 대면인가. 웬만큼 큰 교회에서는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한 사람과 나란히 앉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예배 도중 옆 사람과 인사하라고 하면 어색하게 눈인사를 주고받을 뿐이다.
남은 가능성은 담임목사와 대면이다. 회중석에 빽빽이 들어앉은 성도는 높은 강대상 위나 대형화면 속의 담임목사와 대면한다. 성도 개개인의 개별성이 상실된 채 한 사람에게 귀속되기 쉬운 구조다. 성도가 촘촘히 붙어 앉을수록, 혹은 신천지 집단의 집회처럼 제복을 입고 앉을 경우는 더욱더 집단주의적 성격이 심화된다. 교회가 자정능력을 상실한 채 배타적 집단이 된 데는 이런 예배당의 구조도 일조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함께 서 있는 지체들이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선 안 된다. 기타의 현이 독자적인 소리를 내지만, 함께 어우러질 때 하모니를 이루는 것처럼 홀로 선 성도가 서로 의존하고 섬겨야 한다.
서로를 품을 수 있는 가슴과 서로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위의 시에 따르면, “하늘 바람이 우리 사이에서 춤출 때” 가능하다(지브란은 동방정교회의 영향을 받은 레바논기독교회 배경을 갖고 있다). ‘바람’ 혹은 ‘호흡’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루아흐’나 그리스어 ‘프뉴마’에는 영(靈)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영이 홀로 서 있는 사람 사이에서 춤출 때 부부의 사랑도, 교회 공동체의 섬김도, 시민의식도 모두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따뜻한 숨결이 영혼을 감싸 안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이를 위해 가슴을 열 용기가 생긴다. 때로 우리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초라한 자아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폭풍 속에서 내 편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위한 헌신을 다짐한다. 골짜기에 널브러진 마른 뼈처럼 지쳐 있는 우리 영혼이 한 줄기 생기로 인해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활력을 얻기도 한다. 자기애에 집착하지 말고 집단주의에도 휩쓸리지 말자. 하늘 바람이 내 안에서, 우리 사이에서 춤추도록 하자.
장동민 (백석대 교수)
약력=서울대 철학과,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석·박사(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