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백신의 시간, 야만의 시간

입력 2020-12-22 04:04

“백신이 나온다고 하던데. 지긋지긋한 집콕도 끝나겠네.” 고향의 어머니는 9개월 넘게 은둔 중이다. 인적 뜸한 산길을 오르내리고, 마스크·장갑으로 중무장하고 집 근처 시장을 잠깐 다녀오는 게 바깥공기를 쐬는 유일한 통로다. 그래서 백신은 터널의 끝에 다다랐음을 알려주는 복음이다. 희망을 깨기 싫었지만, 사실은 알려야 하기에 퇴근길 통화에서 말했다. “그렇다고 마스크 벗고 활보하는 날이 금방 오는 건 아니에요. 부작용이 없을지 장담할 수도 없고.”

해외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되자 ‘종식의 날’이 다가오는 듯 말한다. 반대급부로 백신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한 우리 정부를 향한 비판이 거세다. 일일 신규 확진자가 잇달아 1000명을 넘자 비난에 무게가 더해진다. 백신 보급·접종 시간표를 내년 4월 치러질 재보선에 맞췄다는 괴담도 나돈다. ‘백신을 언제 확보할지, 충분하게 확보할지 미지수다’ ‘백신이 경제활동 가능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를 가르는 구분선이 된다’ 같은 불안감도 떠오른다.

일단 손에 쥔 물량은 적다. 우리 정부는 백신 공동구매·배분 프로젝트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로 1000만명 분량을 확보했다. 추가로 4개 제약회사와 협상을 벌이고 있는데, 목표는 3400만명 분량이지만 가시화된 건 아스트라제네카와 맺은 공급계약(1000만명분)뿐이다. 분명 아쉬운 수치다. 뉴욕타임스 분석에 따르면 16개 상위 소득 국가 가운데 캐나다 미국 영국 유럽연합(EU) 호주 일본 등 10개국은 인구보다 많은 백신을 계약했다. 캐나다는 인구 대비 6배, 미국과 영국은 4배, EU는 2배에 이른다.

그러나 눈여겨볼 지점이 있다. 이들 나라는 연구·개발 단계부터 엄청난 돈을 투입하며 개입했다. 막대한 비용을 마다하지 않고 입도선매하기도 했다. 올해 초부터 우려한 백신 패권주의, 자국 우선주의는 착실하게 작동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들 가운데 몇몇은 방역 실패로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억만금을 주고라도 백신을 사재기할 만큼 다급한 셈이다.

또한 현재 개발을 끝낸 코로나19 백신들이 절대해법은 아니다. 백신은 세포 테스트, 동물 실험, 인체 대상 임상시험을 거쳐 안전성을 확보한다. 코로나19 백신도 이런 절차를 다 거쳤다고 한다. 다만 ‘속도’는 물음표를 잉태한다. 임상 1상부터 대량 생산까지 보통 10년이 걸리는데, 이번에는 1년 안에 해치웠다.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이 한 번도 쓰지 않은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방식’이라는 점은 물음표를 하나 더 붙인다. 코로나19가 빠른 돌연변이를 거쳐 여러 변종을 만들어내는 것도 걱정이다.

물론 한가하지 않다. 인명 피해는 늘고, 백신 보급의 불평등은 곧바로 경제 회복의 불평등으로 증폭된다. 독감처럼 매년, 혹은 2~3년마다 백신을 맞아야 할 가능성도 크다. 정부는 방역, 백신 확보, 자체 백신 개발이라는 버거운 숙제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발목을 잡는 덫이 즐비하다. 우리는 돈을 물 쓰듯 하며 백신을 선구매하기에는 관련 예산이 적고, 담당 공무원에게 주어진 권한이 좁다. 미국처럼 모더나에 1조2000억원을 연구·개발 자금으로 주고 실패할지 모를 백신에 베팅했다면, 당장 국회에서 어떻게 나올까. 2009년 신종플루가 유행했을 때 국내 인구의 절반가량 맞을 수 있는 백신을 확보했지만 유행이 잦아들며 백신이 남자 국회는 국정감사를 했고 담당 공무원은 징계를 받았다.

위기에서 미래를 만들지 못하는 정치는 짐만 된다. 잘잘못을 살피지 않고 비판·비난만 퍼붓는 건 야만이다. 지금은 야만의 시간이 아니라 방역의 시간이다. 백신은 정부와 전문가 집단에 맡기고, 방역에 전력투구할 때다.

김찬희 디지털뉴스센터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