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으로 치닫는 정쟁 속에서 여야 간사 간 합의를 이뤄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면 박수 치고 환영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은행법 개정안에 관한 것이라면 간단히 넘어갈 일은 아니다. 일국의 가장 중요한 거시경제 정책 중 하나인 통화정책 목표를 개정하는 법안이라면 보다 깊은 숙고와 논의를 거쳐 진행돼야 한다.
내용인즉슨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 두 가지 통화정책 목표를 명시하고 있는 한국은행법에 고용 안정이라는 목표를 추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경제 성장, 수출 진작 등 국가 경제에 이로운 모든 목표를 망라한들 무엇이 문제이겠냐만은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미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통화 당국으로서는 버거울 뿐만 아니라 추가적 목표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 국민 경제를 반드시 이롭게 한다는 보장도 없다.
통화정책을 통해 고용 안정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 바꿔 말하면 고용 안정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원론적으로는 공감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최근 들어 필립스곡선이 완만해진 데다 국내 요인보다 대외 요인에 의해 국내 물가가 좌우되는 추세가 강해지면서 통화정책의 물가 파급 경로가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도 사실이다. 미국 호주 등 주요 선진국에서도 고용 안정을 물가 안정과 함께 주요 통화정책 목표로 명시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 위기를 거치면서 통화정책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가 신중한 논의 없이 통화정책 목표로 고용 안정을 추가하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지적하는 부분은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통화정책 수단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코로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이 양적완화 수단을 도입하긴 했지만 여전히 정책금리 결정이 한국은행의 유일한 도구인 상황에서 서로 상충될 수 있는 다수 목표들을 달성하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금융기관 감독 기능과 같은 추가적 수단이 부여돼야 하지만 최근 핀테크 감독권에 관한 논쟁을 보면 요원해 보인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통화정책 목표에는 금융 안정이 포함돼 있지 않음에도 금융감독 기능을 갖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두 번째로 많이 지적되는 부분은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미국 호주 등에 비해 상당히 경직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통화정책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고용 상황 개선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면 자산가격 급등을 통해 금융 불안을 유발할 공산이 크다. 우리나라 고용지표가 실물경기와 괴리가 있는 경향이 크다는 점은 이런 우려를 증폭시킨다.
개인적으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될 여지가 크다는 점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통화정책 신뢰도를 높여 최우선 목표인 물가 안정을 달성하기 위해 존중돼야 할 가치이다. 한국은행법에 적시돼 있듯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한다는 기치 하에 현재 통화정책은 암묵적으로 고용시장 상황 또한 십분 고려하고 있다. 코로나 위기 대응 과정에서 유례 없는 양적완화 정책을 도입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용 안정이 명시적으로 추가되는 순간 정치권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한때 남대문출장소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던 한국은행이 각고의 노력 끝에 비로소 확립한 독립성 덕분에 국민 대부분은 인플레이션 폐해가 무언지도 모른 채 살고 있다. 누리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 잃고 난 뒤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한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
안재빈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