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힘 실어주는 작품”

입력 2020-12-21 06:00 수정 2020-12-21 06:00
카카오TV 오리지널 드라마 ‘며느라기’의 장면. 카카오TV 제공

어느 주말 아침, “하루종일 빈둥대자!”며 환히 웃는 민사린을 향해 남편 무구영은 담담히 제사 소식을 알린다. “먼저 데려다줄까? 나는 가도 도움 안 될텐데.” 시댁 분위기는 과연 그랬다. 눈치를 보며 주방에 들어서는 구영을 온 가족이 막아선다. “네가 뭘 할 줄 안다고 앞치마를 두르니?” 사린은 그제야 각자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았다. 그날 구영의 할아버지 제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린의 몫이 되었다. 시댁에 잘 보이고 싶은 ‘며느라기’ 시기를 겪고 있음에도 무척 속상한 날이었다.


여기서 이광영(얼굴) 감독의 섬세함이 발휘된다. 화기애애한 거실과 달리 사린이 서 있는 주방엔 적막이 흐른다. 그 사이 문턱이 유독 높아 보이는 것은 의도한 장치다. 주방에 들어서면 집안 어느 공간도 훤히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만 가면 시야가 탁 막혀 불편함이 느껴지도록 설정한 이유는 그게 며느리의 시선이라서다.

카카오TV 오리지널 드라마 ‘며느라기’는 수신지 작가가 만든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평범한 며느리 민사린과 그 가족의 성장기다. 매주 한 편씩 공개되는 이 작품은 시작부터 폭발적이었다. 최근 공개된 5화는 하루 만에 70만회가 재생되기도 했다. 이 감독은 SBS 드라마 ‘이판사판’ ‘초면에 사랑합니다’ 등을 만든 베테랑 연출가로 며느라기는 그의 디지털 드라마 데뷔작이다.

그는 최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원작을 읽으며 여성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됐다는 느낌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너무 흔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며 “나도 모르게 스며들었던 어떤 일상들이 이 작품으로 조금은 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댁에 잘 보이고 싶은 '며느라기' 시기를 겪는 평범한 며느리 민사린(사진·박하선)이 맞닥뜨리는 일상 속 불편함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카카오TV 제공

이 감독이 웹툰을 접했던 시기는 하필 그가 며느라기 시절을 겪고 있을 때였다. 읽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왜 자발적 며느라기가 됐을까. 그래서 드라마로 만들고 싶었다. 이건 모두의 일이니 이런 고민도 모두가 나눠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드라마를 만들기로 한 순간, 참 신이 났었다”고 회상했다. 영상화하고 싶었던 작품을 꼭 해보고 싶던 포맷으로 만들 수 있어서다. 20분 안에 기승전결을 담아야 하는 디지털드라마라는 신선한 도전이었다. 원하는 시간에,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다는 장점은 연출자로선 또 다른 숙제였다. 채널을 돌리며 어쩌다 볼 수도 없으니, 반드시 찾아와서 클릭하도록 해야 했다.

웹툰과 영상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영상화의 핵심은 원작의 불편함을 강조하되, 지루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린이 느끼는 현재의 불편함으로 극을 끌어가면 시청자가 금방 지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과거 사린과 구영의 연애 시절을 매회 넣으며 대비시키고 있죠. 지금은 왜 달라졌을까, 고민할 수 있도록요.”

현재와 과거의 장면이 교차할 때의 느낌은 기존 드라마들과는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회상 신의 경우 채도를 낮춰 오래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이 작품은 과거가 더 밝다. 현재 신은 오히려 흐릿하고 낡은 느낌을 준다. ‘이들이 어쩌다 빛바랜 사이가 됐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주제의식에 가까워지도록 인도하기 위한 설정이다.

이런 고민은 공간 구성에도 묻어난다. 시댁의 경우 성역할 분리가 공간 분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주방과 거실 사이 선을 그었다. 주방은 여자, 거실은 남자의 공간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반면 신혼집은 탁 트인 공간으로 사린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주방에서 요리할 때도 거실 소파를 바로 볼 수 있다. 이 감독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어쩌면 공간이 성역할을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설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감독은 며느라기처럼 일상적이지만 부수적이었던 여성들의 고충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쏟아지는 지금의 변화가 반갑다. “남성들의 시선에서 남성들이 주체가 되는 이야기는 그동안 너무 많았잖아요.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할 때 아닐까요?”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며느라기는 그래서 힘이 있다. 이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여전히 만연한 불편한 일상들을 향해 손을 내밀 계획이다. “당연한 것 같은 일상을 살고 있지만 당신이 ‘당연하지 않다’는 말을 하게 되는 그 날, 이 드라마가 조금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