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크 작품들이 연말 가요계 한편을 장식하고 있다. 이승철은 지난달 데뷔 35주년을 기념해 본인이 2013년에 냈던 ‘마이 러브’를 소녀시대 태연과 함께한 듀엣 버전으로 선보였다. 같은 달 슈퍼주니어의 규현과 다비치는 김현식의 30주기를 맞아 각각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를 새롭게 불러 발표했다. 인디 음악 애호가들에게 제법 이름을 알린 김아름도 11월 출시한 ‘윈터 시티’ 앨범에 강수지의 ‘혼자만의 겨울’을 차분한 톤으로 손질해 실었다. 이달 코요태는 겨울철이면 라디오에 신청이 쇄도하는 지누의 ‘엉뚱한 상상’을 그들만의 흥을 담아 발매했다. 리메이크가 세밑 대중음악계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중이다.
사실 리메이크의 번성은 결코 생경한 풍경이 아니다. 올봄 방영된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주인공인 99학번 의대 동기생 다섯 명이 같이 밴드 활동을 한다는 설정으로 매회 90년대나 2000년대에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를 내보냈다. ‘아로하’,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등의 OST는 발매 직후 음원차트 상위권에 올랐으며, 현재까지도 높은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여름에는 MBC 예능 ‘놀면 뭐하니?’를 통해 유재석, 이효리, 비가 결성한 싹쓰리의 듀스 리메이크 ‘여름 안에서’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 코요태, 시크한 아이들, 빅스의 라비 등도 90년대 히트곡들을 다시 불렀다. 리메이크는 사시사철 이어졌다.
꾸준히 지속돼 온 이 흐름은 앞으로 몸집을 더 키울 듯하다.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흥행함에 따라 4, 50대 이상의 장년층이 음원 시장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했다. 따라서 이들이 젊은 시절에 좋아했을 노래들을 선보이는 경우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9월 KBS2에서 방송된 나훈아의 공연이 청년층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면서 젊은 세대가 한참 나이가 많은 가수들에게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참가자들이 과거의 히트곡을 주된 레퍼토리로 삼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 근래 부쩍 많아진 점도 리메이크의 증가세에 힘을 보태지 않을까 싶다.
좀처럼 잠잠해질 줄 모르는 코로나19 대유행도 리메이크의 확산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대다수 국민이 몹시 지쳐 있는 상태다. 정신적으로 고단하고 마음에 여유가 부족한 이들이 신곡에 주의를 기울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옛 히트곡들은 친근감을 제공하며, 나아가 코로나19가 없던 평온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가 된다. 이러한 매력으로 리메이크 작품은 많은 사람에게 수월하게 다가간다.
리메이크 노래가 음악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적기다. 기본적으로 대중성이 검증된 노래를 활용하는 것이기에 가수로서는 상업적 실패에 대한 위험 부담이 적다. 다만 리메이크 작업에 뛰어드는 가수들은 자기만의 색다른 해석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요즘 나온 노래들은 단순히 다시 부르는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익숙함도 중요하지만 창의적인 연출이 이뤄졌을 때 듣는 이들이 새로운 감흥을 느낄 수 있다. 추억에만 구걸하는 무미건조한 노래는 얼마 힘을 내지 못한다. 리메이크 붐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양이 아니라 품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