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에 차지 않는 프러포즈였다. 그해 가을, 남편은 자동차 트렁크에서 꼬질꼬질 신문지에 싸인 꽃다발을 멋없이 꺼내 건네주며 사랑한다고, 결혼해달라고 했다. 좋아하는 소국 꽃이 가득 담긴 꽃다발이었다. 내심 드라마에서처럼 풍선이 하늘에 흩날리는 프러포즈를 바랐던 터였다. 사실 그때는 좀 실망했다고, 고(故) 한사현 감독의 아내는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부부가 됐다. 재활원을 돌며 휠체어를 팔던 영업사원과 사회복지사의 결혼이었다.
농구에 그렇게 미쳐 있는 사람인 줄은 결혼하고서야 알았다. 휠체어농구 대표팀 선수를 지낸 그는 실업팀도 없던 시절에 사비를 털어 선수들을 모으고 훈련을 시키며 월급을 줬다. 당시만 해도 본업이 있는 사람들이 전국체전 등 대회를 앞두고서나 모여 보수도 없이 휠체어농구를 하던 때였다. 휠체어 수입 업체를 운영하며 번 돈으로 그는 후배들을 키워야 한다며 아무도 한 적 없는, 앞으로도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 가끔 원망도 했지만 남편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 감독이 10년째 감독으로서 이끌어온 서울시청 휠체어농구팀은 그렇게 만들어진 팀이 모태가 됐다. 국내 장애인스포츠 최초의 실업팀이었다. 한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고 아시안게임 우승과 세계선수권대회 6위를 차지한 뒤 한국휠체어농구연맹이 만들어지고 세계에도 몇 없는 휠체어농구 실업리그가 생겼다. 그는 결국 지난해 대표팀의 패럴림픽 진출을 20년 만에 이끌어냈다. 계획대로라면 패럴림픽이 열릴 예정이던 올해 그의 평생 숙원이 이뤄졌어야 했다.
한 감독은 지난 8월 말 간암이 급작스레 악화했다. 6개월마다 꾸준하게 검사를 받아오고 있던 터라 가족들은 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해질 줄 상상하지 못했다. 의료계 파업으로 부족했던 인력 탓에 응급실에서 잘못된 처방을 받은 게 병세 악화의 원인이었지만, 그는 의사들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다만 시간이 누구보다 절실했다. 입버릇처럼 ‘삶의 이유’라고 말했던 농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9월이 채 지나기 전 세상을 떠났다.
지난 13일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 트로피를 든 서울시청 선수들의 눈가는 물기가 고인 채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선수들은 지난해 한 감독이 우승컵을 들며 “내년에도 꼭 이 자리에 돌아오겠다고 했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국내 휠체어농구 선수들은 상당수가 한 감독 부부에게 빚을 지고 있다. 국립재활원 사회복지사인 아내가 입원한 이들에게 운동을 권하고 한 감독이 선수로 키워내는 식이었다. 한 선수는 “그 정도로 농구에 미쳐 있던 분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한 감독의 대학생 아들은 지난달 그동안 썼던 일기를 모아 독립출판으로 에세이집을 한 권 펴냈다. 본래 9월에 출판하려다 갑자기 아버지 병간호를 하느라 2개월 정도 미뤄진 일이었다. 본래 그런 사연을 담으려 한 건 아니었겠지만, 책의 끄트머리는 자연스레 한 감독의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아들은 책의 맨 끝장에 휠체어를 탄 채 어머니와 손을 잡고 걷는 아버지의 사진을 실었다. 그가 가족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글과 사진이었다.
아들의 책을 더하더라도 한 감독이 남긴 것에 비하면 그를 기억하는 글은 적다. 18일 열린 시상식에서 연맹은 한 감독 대신 참석한 아들에게 공로패를 전해줬다. 하지만 이날 행사를 다룬 기사에서도 영상 축전을 보낸 대통령 부인과 감사패를 받은 기업의 이야기가 더 많았다. 아마도 그들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튿날 한 감독의 가족은 수목장으로 치른 그의 묘소에 공로패를 두고 왔다. 한 감독의 아내는 “올림픽 티켓 따왔을 때도 그렇게 냉랭하던 사람들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 탄식을 듣고서 그를 온전히 기리는 글이 응당 하나쯤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뒤늦게 적어 남긴다.
조효석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