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비극 가운데서도 길을 잃지 않았던 건 배움의 길에서 만난 인연 덕이었다. 애국애족의 마음을 심어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대표적이다.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1년간 학교를 자퇴했던 17세 때 고향교회에서 도산의 마지막 설교를 직접 들었다. 도산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다”며 나라 사랑과 인재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민족과 국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에게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봤다. 무엇보다 자신의 안위를 넘어선 마음의 크기가 존경스러웠다.
중학교 선배인 고당 조만식 선생 역시 도량이 넓었다. 20대부터 신앙생활을 한 고당 선생은 생을 마칠 때까지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숭실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시인 윤동주 역시 잊을 수 없다. 용정에서 온 윤형은 나보다 3살 많았지만,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키가 커 뒷자리에 앉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윤형 역시 나처럼 신사참배 문제로 고민하다 용정의 모교로 돌아갔다. 그는 시를 쓰며 정신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이었다. 일제의 학도병 징집을 피해 도쿄 릿쿄대학에 있다가 교토 도시샤대학으로 옮겼는데 거기서 경찰에 잡혀갔다. 경찰을 피할 길도 있었겠으나 심지 곧은 성격상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시를 남긴 윤형의 희생이 지금도 안타깝다.
중학교 2학년 때 접한 일본의 사회운동가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의 강연도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가가와 목사는 일경이 배치된 숭실학교 강당에서 강연하며 자신의 치부를 공개했다.
그는 “세계 일주를 하다 평양에 도착해 대동강을 지나는데 ‘기생학교’ 건물을 봤다. 그 간판을 보면서 이름 모를 술집 여성으로 산 어머니가 생각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술집 여성이란 걸 부끄러워하며 살아왔지만, 주님이 천한 나를 그분의 일꾼으로 택했다는 사실을 믿고 나서는 생각을 바꿨다. 여러분은 주위 여성을, 내 어머니처럼 버림받는 여성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강연 내용을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저렇게 사는 게 신앙인의 길”이라 생각했다. 일본 유학 중에도 몇 차례 그의 강연을 찾아 들었다.
일본교회뿐 아니라 지성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기독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에게서도 감명받았다. 그리스도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그의 계몽적 사상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정치권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과 교계에 대한 조언에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흔히 그를 무교회주의자라 부르지만, 성경적으로 보수 신앙을 지킨 성경학자였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의 성경 연구엔 순수성이 있었다. 그의 사상을 접하면서 기독교 공동체는 기성 교회의 독점물이 아니며 기독교의 활동 무대가 교회 내에 제한돼선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